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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돌아가는걸까

남은자들이 더 슬픈 죽음

눈을 감았다.


우리나라 말로 돌아가셨다.


암이라는 소식을 듣고 한 달도 안된 지금


선생과 제자로 만난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우리의 첫 인연은 10년 전이었다.


유아특수교육이 전공인 나에게 꽤 똑똑한 아이였다.


부끄러움이 많은 것보단 말하는것이 서툰 아이였다.


초등학교에 가서는 완전통합교육(특수학급 없이 교육청 순회교사의 순회수업 받는 것)을 받았는데 학생순회교사가  내 남편이었다.


그래서 이듬이(가명)  엄마는 항상 우리 부부에게 고마워했다.


내가 아기를 가졌을때 지인에게 헌옷을 받아 옷은 헌옷이 좋다며 한꾸러미 가득 가져와주고 산후우울증으로 힘들어한 내게 나는 최고라며 늘 응원해주던 분,


내 학생의 아빠이자 심성이 고운 아내의 남편을 빼앗아 가버렸다.


장례식장에 들어선 순간 학생들이 떼로 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직감했다.


이듬이 엄마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고 아들 중 하나는 내가 가르치던 학생의 형이었다.


형은 공부를 꽤 잘해서 국제고도 갈 수 있었는데 형편이 안 된다고 들었다.


교우관계도 좋았는지 고3 남자친구들은 눈이 모두 벌겋도록 울며 장례식장 주변을 서성였다.


나도 그 순간부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상주와 인사를 하고 헌화를 했다.


이듬이 엄마가 나왔다.



나는 그저 손을 꼭잡고 이듬이 엄마를 꽉 안았다.


어떤말로도 위로가 안될거라 생각했다.


그저 눈물을  흘리고 안아줄 수 밖에 없었다.


"이듬이 아빠,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선생님 남편처럼 진짜 좋은 남편이었어요.."


'난 이제 어떡하죠'라는 말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때 내 머릿속 아직도 어린아이인 이듬이는 엄마의 어깨를 붙잡고 토닥였다.


"그래서 아빠 좋은곳 갔잖아, 아빠 행복할거야."


나는 어깨를 토닥이고 엄마를 위로하는, 한때 우리 부부의 제자였던 이듬이의 성장을 지켜본 나는 가슴이 아팠다.


누구보다 자신도 힘들텐데.. 엄마를 위로하는 그 모습을 보며 우리 아들도 언젠가는 내가 없는 세상에 혼자 남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얼마전부터 [그리고 모든것은 변했다]라는 책을 읽었었다.


이 책을 보며 죽음이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돌아가신 분의 감정은 알 수 없다. 어쩌면 책의 내용처럼 손전등으로만 비춰본 세상보다 육체를 떠나 더 아름답고 몽환적인 온전한 세계로 가버린 사람은 더 행복해졌을수도 있다.



하지만 떠나고  그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움이란 감정이 깊이 남는다.


어디로 돌아가셨을까,


이듬이 말처럼 좋은곳에 가셨겠지..


그리고 남은 자들은 한동안 고통이겠지만


 부디 이듬이 엄마에게도 고통의 시간은 짧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길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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