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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브런치명 표류기

선량한 다중인격자에서 지킬 앤 하이드 탈출기로

나는 브런치 작가가 되고 난 뒤부터 작가명을 3번 바꿨다.


처음 글을 쓸 때는 엄마로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세 살 엄마의 육아여행기'가 나의

브런치 작가명이었다.


몇 개의 글을 쓰다 보니,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엄마로서만 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톡톡 튀던 내 모습과 성인이 되어 세계를 여행하며 성장한 내 이야기, 그리고 특수교사로서의 나도 드러내고 싶었다.


그래서 또 작가명을 바꿨다.


두 번째 바꾼 작가명은 '세 살' 엄마라는 나이 제약(네 살, 다섯 살 엄마..) 때문에  30일을 기다린 다음 작가명을 교사면서 엄마인 것에 초점을 두어 특별한 엄마의 육아여행기였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 것 같아 꽤 고민하다가 세 번째 작가명 '선량한 다중인격자'이 탄생했다.


내 나름대로는 꽤 신박하고, 흥미로운 작가명이었다.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지만 선량하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담은 내 작가명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내 브런치 작가명을 언급하더니 이상하다고 말했다.



'선량한 다중인격자라는 작가명은 좀 이상해.'


'왜? 다중인격자지만 그래도 나는 선량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말이야.'


'자기가 선량하다고 해 놓고, 선량한 사람 많이 못 만났는데?..'


'그럼 나쁜 다중인격자라고 해야 돼?'


'글쎄, 너를 나타내는 말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할, 할 말 없음).............'





굳이 말대꾸하지 않은 내 속내는 뭐였을까?


엄마로서, 교사로서, 그리고 아내로서 나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내면에 공격성이나 열등감이 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마다 내 감정을 담아두웃고, 유머 있는 사람이 되도록 연습했다.




어릴 적 나는 매우 소심한 아이였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초등학교 1학년, 날씨가 추운 겨울이었다.  화장실을 정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손을 들 수가 없었다. 말을 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난 끝까지 손을 들지 못했고  척척하게 젖어버린 바지로 수치스러운 마음이 느껴졌던 나,


그렇게 소심했던 초등학생은 어디로 갔는지 중학생이 된 나는 완전히 달랐다. 


개성이 강해졌고, 교실에서 손도 못 들던 학생은 이제 수업 시간에 '헛소리'를 자주 하는 미꾸라지 한 마리 학생이 되었다.



그때 난 그랬는지 모르겠다.

친구들이 웃는, 아니 웃어주는 반응을 하면 그게 좋아서 튀고 싶어 했던 무서운 중2병에 걸렸던 것 같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나는 친구 '무리'에 따라 함께 어울렸고 그땐 그게 좋았다.


그렇게 성격이 급변한 듯한 학창 시절을 지나 전문대학에 진학하게 되었고  그때서야 난 현실을 깨달았다.



우린 함께 같은 한 무리라고 놀았었지만 서로 다른 도착지에 도달했고, 그 세계는 서로 다른 세계처럼 많은 것들이 나누어진다는 걸 대학교에 가서야 느끼게 었다.


학업으로서는 내세울 것도 없었던 이름 모를 대학교에 진학한 나는 '불법체류라도 하라'는 아빠의 권유로 미국 배낭여행을 하게 되었다.


40시간이 넘는 버스 여행구간을 지나면서 나는 나에 대한 생각 그리고 미래의 꿈에 대한 생각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했다.


 내 안에 생긴 꿈은 성냥개비처럼 작은 불씨였고, 내 불씨는 남편이라는 거대한 바람과 만나 크나큰  불씨가 되었다.


남편은 늘 내게 시험을 보라고 지지해 주었고 매일 저녁 도서관과 저녁밥을 책임지며 나를 내조했다. 그리고 난 임용에 합격했다. 그건 내생에 큰 성공경험이었다.


임용 뒤 방학 동안 여행을 꾸준히 하면서 세계의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문화와 세상에 적응하면서 나는 완전히 화려한 봄을 만난 처럼 만개한 것 같았다.


나는 우아해졌고 그렇게 보였으며 완전히 날아오른 독수리 같았다.


아이를 임신하면서 이 정도면 모든 준비(안정적 직장, 다정한 남편, 엄마로서의 지식과 마음가짐)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나만의 드림하우스를 머릿속에 그렸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발달에 대한 고민과 내가 생각했던 육아 과정 중에 수시로 으르렁대는 내 모습과 부딪히며 나는 깨달았다.


뿌리는 여전히 약하고 내 안의 내면세계는 아직 어둡고 침침하다는 걸, 그 사실을 미술치료 하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미술치료 수업은  강사의 이야기를 주로 들고, 들었던 작품을 가지고 나만의 방식으로 꾸미는 시간이었다.


1회기는 [프리다 칼로]를, 2회기 차에는 [뭉크] 작품을 보고 나만의 작품으로 표현하는 시간이었다.


이 작품은 프리다 칼로의 <부서진 기둥>을 보면서 내 장점을 표현한 작품이었다.


나는 프리다 칼로의 속상하고 아픈 마음이 나타난 그림을 다른 모습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내가 바꿔본 부서진 기둥은 <작품명: 보여줄게>로 변신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해 집착하는 프리다 칼로가 아닌 완전히 달라진 도도한 여성의 모습을 표현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내 모습을 있는 대로 보여주기보다는 가릴 건 가리면서 (못 박힌 가슴, 그리고 연결된 눈썹에 안경 쓰기, 짧게 자른 머리 등)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려냈다.


나도 육아를 하면서 못이 박히듯 고통스러운 마음의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 뿌리가 약했기 때문에 더 흔들렸고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발버둥 쳤다.


어떠한 시련은 날 더 멋진 사람으로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보여줄게' 작품은 내 장점이었다.

  그건 아이를 낳아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아이 덕분에 더 열심히 살아가게 되어 멋진 회복탄력성이 높은 내 장점이 잘 반영되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미술치료에서는 [뭉크]의 두 가지 작품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자유롭게 표현해 보는 것이었다.


두 가지 그림을 가지고 나는 어떻게 표현해 볼까 고민을 하다가 내 안의 다중성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


작품명은 내 세 번째 브런치 작가명 다중인격자를 그린 모습이었다.

난 선량한 다중인격자를 작가명으로 했던 만큼 인간의 다중성, 그리고 나의 다중성에 대한 표현을 하고 싶었다.



우아하고 매력 있고 주목받고 싶은 나의 외면의 욕구와 내 안의 깊은 좌절감과 우울감, 슬픔은 가슴 안쪽에 넣어놓았다.



그리고 파스넷의 굵은 질감과 강렬한 색감으로 [마돈나] 작품의 화려한 부분을,


 검정과 빨간색 파스넷으로 피의 강렬함과 슬픔을 [절규]로 표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좋고, 행복한 모습을 보이려고 한다.


굳이 나쁜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래서 내가 표현한 작품처럼 내 안에서는 절규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화려하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살고 싶어 했다.



HAPPY라는 말속에는 HA(웃음)와(과) PPY(피)가 함께 섞여 있다. 웃는다고 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보려고 살아왔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설명한 작품을 보며 사람들은 칭찬했고, 감탄했고 또 공감했다.


이런 나의 다중성을 인정받은 느낌이라서 더 뿌듯했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그건 정직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린 사회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네 번째 브런치 작가명 [지킬 앤 하이드 탈출기]로 선량한 지킬 박사가 하이드와 만날 때마다


"그래, 승냥아. 너도 나지만 난 널 다스리며 살아갈 거야!!."라고 외치고 있다.


그리고 지킬과 하이드가 자주 만나길 원치 않는다.


그래서 난 오늘도 내 작가명 지킬 앤 하이드 탈출기가 참 마음에 든다.


오늘 나의 기분은, 선량한 지킬박사에 가깝다. 그리고 하이드가 찾아와도 그 상황을 잘 직면하고 탈출해 나가는 현명한 '나' 자신이길 바라본다.


미술치료로 만나본 나의 브런치명 표류기 끝.



 (지금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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