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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지말고 나를 나타내면 다시 시작이야

가나다 삼행시

연구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2024 지역 연구회 회장님이 되었다.


임용고시 후 6년동안 특수교사로 살았고,

엄마로서 3년을 살았다.


엄마로서의 3년은 앞으로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대해 교사로서의 나보다 훨씬 고민하게 되었고 피눈물 나는 쓰라린 경험은 성장 밑거름이 되었다.


육아휴직 내내 우울함이 깔려있었기에 18개월만에 복직을 했다.


엄마로서의 나는 아이에게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았다.

내 아이를 치료하고 싶었던 순간도 난 내가 해줄 수 있는게 많이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던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기준과 다른 내 아이를 보며 나를 평가받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들을 돌이켜보니 나는 내 자존감의 뿌리가 얕았기 때문에  성장통이 꽤 심했음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가마니였다.


그냥 가만히 있는 가마니..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표현을 하지 못해 바지에 소변을 해도, 깜시와 위장병이라는 친구들의 놀림에도 어쩔 줄 모르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앉아있거나 '하지 말라고!' 소리내어 화내는 것도 어려운 [가만히 있는 어린아이]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잘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어린 애가 알겠냐며 초등학생은  그럴수도 있어라고 말해주고 싶겠지만

[소중한 나]라는 것을 배우는 것은 유아기 만3세 시절부터이다.


유치원 시기의 아이들을 만나보면 확실히 사랑을 받고 자기표현을 잘 하는 아이들은 분명히 자신감이 있고 부당한 것에 자기 표현을 잘한다.


유아기 시절의 내 가정은 불안했다.

엄마아빠는 자주 다투었고, 동생은 장애가 있는줄은 몰랐지만 늦게까지 소변을 했고 학교에서는 집중을 못해 '니 동생은 바보냐?'라는 말을 들었다.


 너무 화가 났지만 지켜줄 방법도, 그럴만한 말주변도 없었다.


그 당시 우리집은 발로 차면 대문짝이 열리는 허술한 흙집이었다.


비가 내리면 빗물이 새던 지붕을 공사했고 허름한 주방에서는 동생에게 김치볶음밥을 해줬던 낡은 후라이팬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만큼 우리는 어리다고 해서 보호받던 아이들도, 귀여워 죽을 같아서 볼따구를 비비며 사랑을 나누는 가족도 아니었다.


택시 일을 하느라 3교대를 번갈아 하는 엄마, 아빠의 틈바구니 안에서 나는 탱탱볼처럼 바닥에 부딪혀가며 세상과 타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뿌리깊지 못한 나무였던 나는 20~30대가 되어 세계여행을 통해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독립심을 길렀고 교사가 되면서 완전히 삶을 바꾸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남들보다 더 잘 키우고 싶었던 내 욕망이 아이의 발달 앞에서 불안과 좌절감으로 하루하루 채워졌고, 아이에 대한 사랑이 아닌 정서적으로 내 아이를 학대했다는 생각을 할만큼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니였다.


육아휴직을 끝내고 다시 복직을 하면서 교육청에서 근무했다.


학교에서 아이를 가르칠 때는 몰랐던 교육청에서의 나는 '나댈 기회'가 많았다.

나를 표현했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면서 다시 교사로서의 삶도 시작되는 것 같았다.


어떤 역할을 맡으면서도 전년도에 했던 업무를 그대로하기보다는 새로운 행사, 더 좋은 영향력을 주기 위해 고민했다.


나는 교육청의 특수교육지원센터에서 근무하는 순회교사이다.

사실, 교사중에서도 생소한 직업군이다. 대부분 교육청은 아주 많아도 200명 이상의 집단에서 3명정도밖에 되지 않는 내 직업은 0~2세 아이들부터 시작되는 교육을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엄마가 되고 내 아이가 연구대상이 되었던 때를 떠올리면서 난 가만히 있을수가 없었다.


내 아이의 발달이 느릴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더 진심으로 내 직업에 진심일 수밖에 없었다.


내 전문성을 살려 우리 아이가 자라날 시기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고민했고, 우리 아들은 아직도 대근육발달과 사회성은 낮지만 언어이해력과 표현력은 상위 10%일만큼 성장했다.


복직하여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과 유치원의 빛나는 시기에 소중한 시간들을 흘려보내는 부모님들이 안타까웠다.

주변의 발달이 느린 아이들과 더불어 내가 가진 지식과 다른 전문가들에 대한 배움욕구는 더 커졌다.


그래서 난 2023년부터 친하게 지내던 경력이 많은 선생님에게 내가 고민하고 있었던 점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하게 되었다.


그러다 2024, 3월 초 갑자기 장학사님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혹시 연구회 해 볼 생각 있어요?'

'(당황.......) 아, 무슨 연구회요?'

'제가 ㅇㅇ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선생님이 연구하고 싶다는 것이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저는 특수교육대상자, 느린학습자와 더불어 아이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놀이를 통해 어떻게 보편적 학습설계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한다고 얘기했던 것 같아요'

'그럼, 한 번 그 주제로 연구회 해 볼래요?'


나는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뭔가 연구회를 할만한 깜냥도 되지 않았고 그저 이러한 연구회를 하고 싶었다라고 말만 했을 뿐인데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실행해야 할 지 까마득했다.


몇일을 고민했다.


그러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가만히 있는 자들의 비극]이라는 책의 제목을 접하게 되었다.


내용은 세월호에 관련된 내용이었지만 그냥 제목 자체로 나는 가만히 있는 사람이 된 것 마냥 슬펐다.


그리고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된다는 둥의 연계글이 나오면서 '그래, 뭐든 나를 드러내보고 시작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학사님, 저 연구회 해볼게요!'


그리고 정말 다 시작되었다.


내 또다른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2024. 5. 7. 첫 연구회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교육청 바로 옆 도서관에서 선생님들에게 준비한 도서와 영상, 그리고 연구방향에 대해 설명했다.

설레였고, 유용했다는 연구회원들의 반응 덕분에 신이 났다.


이전에 내 글에서도 사회적 장애인식개선 수업을 100여명 앞에서 하면서 뿌듯해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말하는 것도, 나를 드러내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게된 것처럼 감탄했다.


이제 시작되는 연구회를 운영하면서 나는 더 성장하려고 한다.


느린학습자를 이해하고, 내가 가르치는 특수교육대상자(장애를 가진 아이가 아닐 수 있음), 그리고 발달에 대한 이해를 통해 내 아이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도 자신감과 전문성을 가지려고 한다.


비록 나대느라 좀 더 피곤해졌지만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듯  나도 내 자신을 드러내며 시작을 해보면 결국 모든건 다시 시작되지 않을까



비록 난 엄마로서 좋은 엄마는 아니었지만 다시 연구하는 교사로, 또다른 직(연구회장직??)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



가나다,  라라라..~

즐겁게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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