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 자유에 관한 정의는 셀 수 없이 많지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이 문장만큼 짧고 쉽게 정곡을 찌른 정의가 또 있을까. 이제 나는 이 묘비명(墓碑銘)을 다시 내 마음에 새기려 [銘心] 한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로부터의 자유’와 ‘~를 위한 자유’라는, 두 단계의 자유를 통해 자유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를 위해 중세 해체기에서 나치가 등장하기까지, 그리고 대중 소비사회가 정착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에서 자유가 어떻게 부각되고 변질되고 왜곡되었는지를 분석했다. 이 책의 논지는 ‘~로부터의 자유’는 얻었으나 ‘~를 위한 자유’는 얻지 못한 대중들이 나치와 소비사회에 맹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프롬은 이 현상을 '자유로부터의 도피'로 규정했다. 그런데 카잔차키스는 프롬이 유배지 미국에서 오랜 사유와 분석 끝에 얻은 결과를, 어쩌면 그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이 묘비명의 단 세 마디로 요약했다.
카잔차키스의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프롬의 ‘~로부터의 자유(소극적 자유)’에 해당한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를 위한 자유(적극적 자유)’를 포함해 더 높은 차원의 자유를 지칭한다. 높은 차원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를 위한 자유’는 모종의 정신적인 지향이 있는 상태임에 반해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그 정신적인 지향조차 초월하여 무욕과 무념무상의 수준에 이른 단계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는 “일흔 살에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는 공자님 말씀도 연상된다.
카잔차키스는 이미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그런 형태의 자유를 형상화한 바 있다. 이 소설의 화자가 조르바에 대해 하는 말을 떠올려보자.
“그렇다. 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母胎)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는 그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뱀을 숭배하는 이유는 뱀이 온몸을 땅에 대고서 대지의 비밀을 배로, 고리로, 고환으로, 대가리로 알아차리기 때문이거든. 뱀은 늘 어머니의 대지를 만지고 접촉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지. 조르바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처럼 먹물을 뒤집어쓴 사람들은 공중에 나는 새들처럼 골이 텅텅 비었지.”
조르바의 자유, 곧카잔차키스가 꿈꾸는 자유는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지니고 ‘온몸을 땅에 대고 살아온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겠다. 사회와 제도가 부추기는 경로를 거부하고 내면의 순수함을 따르는 삶, 그래서 헛된 욕망과 가식이 없는 삶. 카잔차키스가 조르바를 통해 말하려는 자유의 의미를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자유는 그렇게 살아온 삶에 주어지는 보상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유관을 가진 사람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