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웅 신부 등 시민사회 원로들이 1,500여 명 시민들과 함께 윤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했다. 권영길, 이부영, 황석영, 이만열 등 7,80년대 민주화를 이끈 주역들이다. 발언의 수위는 역대급으로 높다. 그들은 “온갖 망동으로 나라를 망치고 있는 윤석열 정권의 국정 난맥상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2년 반이나 남은 임기는 죽음처럼 너무 길기만 하다”며 “모두 일어나 윤석열 정권을 퇴진시키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제는 원로가 아니라 원로 할아버지가, 시국선언이 아니라 시국선언 곱빼기를 했대도 이 정권은 눈도 깜박하지 않는다는 것. 유신 때나 5공 때는 이 정도면 정권 수뇌부가 손발을 벌벌 떨었다. 그래서 시국선언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주요 인사를 가택연금했고, 대학에는 짭새들을 상주시켰다. 내 대학시절, 학생회관 옥상에서 뿌려진 시국선언문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수거하라는 특명을 받은 듯, 마치 파리나 모기 잡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던 그 짭새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0년대 재야인사로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만으로 계엄법에 따라 수년간 징역을 살았다. 4.19 당시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대학 교수 258명의 시국선언과 시위는 이승만 대통령 하야의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무도한 정권 입장에서 시국선언은 거론되어서는 안 될 금기어였고, 발표 자체가 원천봉쇄되어야 할 의미 있는 기호였다. 그리고 발표되었다면 주동자는 과도한 고문과 형벌에 처해졌고, 단순 참여자도 크고 작은 치도곤을 당했다. 그런 시국선언이 이제는 의미를 거의 상실한 종이 쪼가리이거나 뉴스가치가 거의 없는 불임의 콘텐츠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동안 시국선언에 대한 정권의 태도는"잘못했어요"에서 "어디서 감히!"로, 다시 "그래서 뭐 어쨌다고?"로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이거슨 역사의 발전인가 퇴보인가?
그러니까 이런 얘기가 된다. 이 정권이 유신정권이나 5,6공정권과 다른 점은, 머리와 가슴에서 양심이나 수치심, 측은지심 같은 정신적 작용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 오로지 법, 그것도 자신들에게만 유리하게 해석되는 법이라는 기준만이 존재한다는 점. 문득 예전 개콘의 유행어 "사람이 아니무니다."가 떠오른다. 사람이 아니라면 벌레? 법을 좋아하는 벌레라면 법충(法蟲)?
법충들아, 기다려라. 머지않아 시국선언에 담긴 경고를 경청하지 않은 데 대한 후회와 반성, 그리고 국민과 역사에 대한 참회 등 정신적 작용이 일어나리니. 그때 너희는 비로소 사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