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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Aug 18. 2024

미완성 개혁도 개혁일까?

 김대중 서거 15주기에 떠올린 '개혁군주' 정조

1.

개혁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을 꼽자면, 대통령 중에는 김대중이고 중에는 정조 이산이다. 그런데 정조를 개혁군주라고 평가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나는 정조를 개혁군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보는 편이다. 신해통공/서얼회통/군제개혁 등 완수된 정책만으로도 개혁 군주의 자격을 갖췄다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개혁성을 의심하게 만드, 그래서 결국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지 못하게  두 가지 사안이 있다. 하나는 그가 아버지(사도세자)에 대한 추모의 감정 즉 사감(私感)이 지나치게 컸다는 의심이고, 다른 하나는 문체반정으로 대표되는바 복고적 성향이 강했다는 의심이다. 늘 그런 의심을 지니고 있던 차에,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역사학자 김준혁의 『리더라면 정조처럼』을 읽으며 이 의문들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2.

먼저 아버지에 대한 추모의 감정이 컸다는 의심에 대하여. 정조가 즉위한 해는 1776년, 영국의 식민지 미국에서는 독립선언서가 울려 퍼지고 절대왕정 국가 프랑스에서는 시민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어갈 때였다. 이렇듯 정조가 등장한 시점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시민(부르주아)의 힘이 커가고 있었던 세계사적 전환기였다. 이렇게 본다면 정조의 개혁이 과연 세계사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을까 하는 물음 앞에서 허탈해지는 게 사실이다.


도올 김용옥은 어디선가 정조의 개혁에 대해, 다산 정약용과 같은 유능한 측근을 유럽이나 미국으로 보내 서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급격한 변화의 물결을 이해하고 습득해야 할 시기에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제사에 몰두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사도세자에 대한 제사’란 사도세자의 호칭을 장헌세자로 고치는 일, 배봉산에 있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명명한 일, 신도시 수원 화성을 건설하고 거기서 아버지를 복권시키려 한 일 등을 뜻한다. 정말로 왜 아버지에 심하게 몰두했을까?


이에 대해 『리더라면 정조처럼』은 이렇게 설명한다.  


“효장세자의 아들로 호적이 정정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모르는 이는 조선팔도에 단 한 명도 없었다. (...) 그러니 역시 문제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역적의 아들이 국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명분론을 중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너무도 큰 문제였다. 그래서 정조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 사도세자의 호칭을 장헌세자로 고치고 양주 배봉산에 있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이 책은 이렇듯 정조가 정통성을 회복하려고 한 이유가 명분론에 있었음을 확인하면서, 정통성 회복의 마지막 단계로 화성을 건설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정조의 정통성이 회복될 수는 없었다. 정통성이 없는 국왕은 어떤 정치를 추구해도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았다. 그래서 정조는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마지막 단계로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는 일을 추진했다. 즉 자신의 아들인 순조가 15세가 되면 자신은 국왕의 지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화성에 거주하는 것이었다. 사전 준비 작업으로 1793년 1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도시의 위상을 높였고, 이듬해부터 축성을 시작하여 그 어느 세력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군사도시를 만들었다.”


정조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는 일을 자신의 왕으로 있을 때 하지 않고 왜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 하려고 했을까? 이 책은 선왕인 영조의 엄명 때문이었다고 짚은 바 있다. 영조는 죽기 전 세자였던 정조에게 절대로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 책은 화성건설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정조의 개혁구상의 핵심이 바로 화성건설이었다. (... 화성은) 조선 사회의 변혁의 근거지이자 모델이 되는 도시였다. 상업을 진작시키기 위해 상인들을 유치하여 활발한 사업을 추진케 하고, 농업을 육성하기 위해 둔전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더 나아가 군정의 폐단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고자 했다. 화성에서 적극적인 실험을 한 이후 이것이 성공하면 조선팔도 전역으로 확대해 시행할 의도를 정보는 가지고 있었다.”


요약해 보자. 정조가 완전한 개혁을 위해 밟으려는 절차는 다섯 단계였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첫째는 정통성 회복, 둘째는 화성 건설, 셋째는 상왕으로 2선 후퇴, 넷째는 화성에서의 개혁 실험, 다섯째는 개혁성과의 전국적 확대. (이런 식의 단계별 구분과 명칭은 이 책에 없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요약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셋째 단계인 상왕으로 2선 후퇴하는 시기를 세자(순조)가 15세가 되는 1805년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누구다 알고 있듯이 정조는 1800년에 독살로 의심받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하고 말았다. 둘째 단계가 채 마무리되기 전이었다.     



3.

복고적 성향이 강했다는 의심에 대하여. 정조는 ‘문체반정(文體反正)’으로 대표되는 복고 정책을 주도했다. 복고는 그 벡터가 개혁과 반대방향인데, 개혁군주가 취할 바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문체반정이란 “조선후기 정조 때에 유행한 한문문체를 개혁하여 순정고문으로 환원시키려던 정책”을 말한다. 이어서 이 사전은 “정조 당시 패관잡기나 명말청초 중국 문인들의 문집에 영향을 받아 개성주의에 입각한 참신한 문체가 크게 유행하였다. 정조는 이를 배격하고 순정한 고문의 문풍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불순한 문체의 기원이 박지원과 그의 저작인 『열하일기』에 있다고 보고, 박지원에게 순정한 고문을 지어 바치도록 하였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에 대해 『리더라면 정조처럼』은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정조는 공자의 위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군사의 지위를 얻고자 한 정조는 주자성리학이 만연한 시대에 공자의 학문으로 들어갔다. (...) 당시 주자성리학은 노론 중심으로 집중되었고 주자가 이야기한 학문 이외에 다른 학문을 꺼내면 사문난적이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 주자성리학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노론이 모든 분야를 장악했다. 그래서 정조는 강력한 군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주자성리학보다 높은 차원에서 공자의 학문을 논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다. 주자가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공자를 능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혁을 위해서는 강력한 개혁 저항세력인 노론 그중에서도 벽파를 눌러야 했고, 이를 위해 공자의 학문으로 그들이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주자성리학을 공격했다는 해석이다. 과연 영민한 군주답게 대단히 단수 높은 정책으로 보인다.  


4.

『리더라면 정조처럼』은 나의 해묵은 의문들을 어느 정도는 풀어주었다. 하지만 이 책은 논리적 비약이나 내용상 빈틈도 언뜻언뜻 드러낼뿐더러 정조에 대한 애정이 과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서도 또 다른 두 가지 의문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첫 번째는 정조의 5단계 개혁 플랜 중 2단계도 채 성사되지 않았다면 과연 그를 개혁군주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고, 두 번째는 문체반정은 개혁 저항세력을 물리친 정책일 수는 있어도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퇴행적 정책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린 형국이 아닌가 싶다.


정조는 과연 개혁군주였을까? 개혁인 것은 무엇이고 개혁이 아닌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디까지를 그가 꿈꾸고 어디부터는 나중에 부풀려졌을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리더라면 정조처럼』은 그렇게 또 다른 의문을 낳게 하는 책이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정조가 개혁을 꿈꾼 군주 즉 미완성 개혁군주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이다.  미완성 개혁도 개혁이라고 말한다면 정조는 개혁군주이고, 미완성 개혁은 개혁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정조는 개혁군주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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