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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의 기원에 관한 지극히 사적인 기억

안병직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by 까칠한 서생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입추(立錐)의 여지가 없다”라는 말은 송곳을 세울 만큼도 남은 땅이 없다는 뜻이다. 흔히 사람들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광경을 묘사할 때 상투적으로 사용되는 비유다. 1982년 어느 쌀쌀한 봄날, 내가 다니던 대학에 개설된 ‘한국 근대경제사’ 강의실이 꼭 그랬다.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때, 진보적 학자의 상징으로 꼽히던 A교수가 우리 대학에 와서 강의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큰 화제였다.


당시엔 꼭 운동권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굳이 무슨 혁명이 아니더라도, 세상을 바꿔보고 싶어 하는 대학생이 많았다. (하긴 대학생이라면 어느 시대엔들 안 그랬을까) 그리고 그 대다수는 유물사관에 어느 정도씩은 경도되어 경제사를 공부하며 당대의 역사적 과제를 가늠하고 있었다. ‘서경’이라고 줄여 부르던 『서양 경제사론』은 그런 대학생들의 애독서였다. 조사와 어미만 빼고 거의 모든 문장이 한문으로 된 그 책을 나도 밑줄 쳐가며 읽었었다. 그런데 그에 필적하는 한국 경제사 관련 책은 마땅치 않았다. 그러니 여차하면 한국 경제사의 지존인 A교수의 소속 대학으로 가서 청강이라도 할 판인데, 마침 그가 우리 쪽으로 왔으니 열화 같은 호응을 받은 건 당연했다. A교수의 이름은 안병직. 훗날 일본과 이승만과 박정희를 숭배하는 ‘뉴라이트’의 대부, 일제 강점기를 미화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창자로 알려진 바로 그 사람이다.


2.


나는 당시 경제학과 3학년 생으로서 수치와 도표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주류경제학에 이미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다만 비주류인 경제사와 경제사상사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경제학과 학생의 정체성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에게 ‘한국 근대경제사’ 강좌는 구원의 동아줄 같은 것으로 보였다. 그만큼 기대가 컸다.

하지만 서너 번 듣고 나서는 그 강의에 실망하고 말았다. 그 구체적인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 마디로 강의 내용이 기대와 많이 달랐던 탓이다. 나는 결국 그 강의를 끝으로 경제사를 향한 관심을 접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교수의 강의가 성에 차지 않는다고 그 분야에 대한 학문적 관심까지 버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경제사 영역의 지존이라고 인정받는 학자의 입장을 감히 넘어서거나 비켜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비전공 원로 교수가 영혼 없이 가르치던 ‘경제 사상사’(당시 강의명은 ‘경제학설사’)에 대한 관심까지 접으면서 경제학이라는 학문과 나의 실제적 인연은 완전히 끝나버렸다. 그 학기 이후 나는 오랫동안 다른 학과를 두리번거리는 등 캠퍼스 안팎을 떠돌며 방황했다.


3.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존경받는 진보적 학자였던 그가 친일, 친이승만, 친박정희로 요약되는 ‘뉴라이트’의 대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건 2000년이 지나서였다. 당연히 그가 왜 그렇게 급회전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내가 그의 강의를 듣던 1982년에도 그런 극우적 시각이 강의 내용 속에 들어있었던 건 아닌지, 내가 그의 강의에 실망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던 건 아닌지 강한 의심이 들었다. 자신의 수제자이자 뉴라이트의 또 다른 상징인 이영훈 교수와의 대담집,『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1984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역사평론』(일본 역사 전문잡지-저자 주)에 실린 나카무라 사토루의 ‘중진자본주의론’을 보게 되었습니다. (...) 당시 한국경제의 동향을 민감하게 관찰하고 있던 나로서는 제3세계에서도 자립적인 자본주의 성립이 가능하다는 나카무라 교수의 주장은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요컨대 1984년 우리나라도 자립적인 자본주의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일본 교수의 주장에 접한 이후에 ‘전향’했다는 것이다. 1984년은 내가 그의 강의를 들은 다음 다음 해다. 위 책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자료와 기록에는 그의 전향 시기를 1980년대 후반, 구체적으로는 일본 동경대 교환교수를 마치고 돌아온 1987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내가 강의실에서 접한 그의 강의 내용에 그의 극우적 견해가 들어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매우 약하다. 하지만 1982년에도 어느 정도는 그 조짐이 있었다는 심증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4.


챗 GPT에 물어보기로 했다. “전 서울대 교수 안병직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이며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혹시 1980년대 초반에도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챗 GPT라는 녀석의 대답은 놀라웠다.


“엄밀히 말해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명칭과 체계는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하지만, 그 이론적·자료적 기반은 안병직을 중심으로 1980년대 초반부터 형성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80년대 초반에도 ‘식민지 시기 조선의 경제구조에 대한 실증적 재해석’이 이루어졌고, 이는 후일 ‘식민지 근대화론’의 전신(前身)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녀석은 그 근거로, 안 교수가 1980년대 초부터 이미 조선 후기 사회의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했다는 점, 일제강점기의 토지조사사업이나 식산은행 등의 경제 효과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해석했다는 점, 조선 경제의 근대화가 일제 수탈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점 등을 들었다. 1981년『경제와 사회』라는 학술지에 실린 「한국자본주의의 발전과정과 특질」이라는 논문 등을 그 전거로 삼았다.


녀석의 분석이 맞는다면, 1982년 한국 경제사 강좌가 열린 강의실에서 나는 안 교수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관련된 주장을 들었다는 것이고, 그에 실망해서 경제사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 녀석이 때론 둘러대기도 하고 거짓 정보를 전하는 등 완전히 믿지 못할 구석이 있으니 최종 결론은 유보하기로 하자.


5.


“뉴라이트가 보는 한국 근현대사는 한마디로 자본주의화의 역사다. 단 하나의 기준으로 역사를 재단하니 일제 통치도 고마운 일이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도 자랑스러운 것이다.”

-김기협, 『뉴라이트 비판』중에서


역사를 자본주의라는 기준으로만 바라본다는 건, 이를테면 어떤 사람을 수학 점수 하나로만 평가하겠다는 것처럼 무리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수학 말고도 국어도 영어도 있고 사회도 있고 음악도 있다. 시험 성적 말고도 문장력, 창의력, 소통 능력, 봉사활동, 미술이나 음악 등 예술에 대한 이해력도 있다. 더 크게는 타인에 대한 배려심, 공적 책임에 대한 사명감이나 민족정신도 있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해야 정확히 내려질 수 있다.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역사를 재단하는 편협한 사고방식이 어째서 학계를 넘어 정계와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1987년 낙성대연구소에 모였을 때, 이제부터는 이론이 아니라 실증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회변혁이 아니라 경제사 연구가 목적이고, 그런 목적에 충실하려면 이론보다는 실증이라는 뜻이지요. 그 점이 나의 전향이라면 전향의 진정한 뜻입니다.”

-안병직·이영훈 대담,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중에서


안 교수가 스스로 말하는 전향의 핵심은 이론에서 실증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론은 마르크스주의를 말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기반인 사적 유물론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사적 유물론이란 역사적 발전이 물질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관점의 이론이다. 교조적인(또는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물질적 조건(다른 말로 경제적 기반)은 하부구조로서 정치적, 법적, 문화적 상부구조에 영향을 미친다는 도식을 신봉한다. 이른바 '기계적 반영론'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워낙 생뚱맞아서 훗날 마르크스조차도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을 정도였다. 안 교수는 마르크스주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증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강화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6.


일본 우익이나 토왜(土倭)들의 역사 왜곡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어김없이 떠오르는 말이 있다. 1944년 조선의 마지막 총독으로, 일본의 전 수상 아베 신조의 증조부로 잘못 알려지기도 한 아베 노부유키의 기분 나쁜 저주가 바로 그것이다. 그자는 패망 후 우리 땅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조선은 문명을 회복하지 못하고 서로 이간질하며 싸우는 노예적 삶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나 아베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가 실제로 이렇게 말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우리가 ‘서로 이간질하며 싸우는 노예적 삶’을 살고 있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그때 심어놓은 식민교육 때문이든, 아니면 그 후 일본 우익 자금의 유입 때문이든 우리는 80년 전에 끝냈어야 할 역사 논쟁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나도 40여 년 전 강의실에서 느꼈던, 누군가가 역사를 비틀고 있으나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에서 여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7.


1982년의 ‘한국 근대경제사’ 강의실은 적어도 두 사람의 진로를 바꿔놓았다. 한 사람에게 그 강의실은 진보적 학자에서 친일 친이승만 친박정희라는 극우의 길로 변침하는 계기가 된, 기회의 장소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 그 강의실은 그동안 믿어오거나 믿고 싶었던 가치들을 혼돈과 회의의 바닷속으로 내던진 계기가 된, 위기의 장소였던 셈이다. 물론 전자의 기회는 그 이후 정치·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후자의 위기는 지극히 사적인 고난에 불과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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