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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사면 배 아픈 이웃사촌, ‘기호네’의 추억

이야기가 있는 다큐드로잉 17

by 까칠한 서생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옆집에는 어김없이 ‘기호네’가 살았다. 강원도 농촌마을에서 이웃 소도시로 이사한 첫 집에서 나란히 셋방을 살던 이웃이 바로 ‘기호네’였다. 그런데 두 번째 셋방을 산 집에도 바로 그 ‘기호네’가 있었다. 두 가족 모두 먼저 살던 집에서 나와야 할 일이 생겨 새 집을 구하다가 우연히 같은 집으로 이사하게 된 거라고 나중에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다. 기막힌 인연이었다. ‘기호네’와 이웃해 산 기간은 4년쯤 된다.


‘기호네’에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친구 ‘기호’, 그리고 나보다 한 살 적은 여동생과 서너 살쯤 적은 남동생도 있었다. 나는 수시로 그 집에 가서 그 세 남매와 잘 어울려 놀았다. 그들과 함께 동네 공터에 나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말 타기’며 ‘다마 치기’며 ‘비석치기’ 따위를 하며 놀기도 했다. ‘기호네’와 우리 집은 그야말로 숟가락이 몇 개인지, 오늘 아침 반찬이 무엇인지까지 속속들이 아는 사이였다. 어머니끼리는 어쩌다 밥이나 김치가 부족하면 서로 꾸어왔다가 다음날 갚기도 했고 돈거래도 수시로 했다. 동네사람들 흉도 스스럼없이 나누는 사이였다.


하지만 내가 ‘굠마’라고 줄여 부르던 ‘기호 엄마’는 질투가 많은 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한글을 떼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2학년이 되도록 한글을 떼지 못한 기호에게 곧바로 매타작을 한 적도 있다. 기호가 나를 힘으로 제압하지 못한 사실이 분해서 다음날 바로 기호를 태권도장에 등록시키기도 했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나의 어머니도 기호에게 그런 질투심을 시전하지 않았다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보면 기호와 나는 어른들이 놓은 프레임 속에서 허물없는 친구이기보다 보이지 않는 경쟁자로 자랐던 셈이다.



2.


‘괜찮아유’라는 인기 개그 코너가 있었다. 〈유머 일번지〉라는 KBS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코너로, 1991년 5월부터 10월까지 약 6개월간 방영되었다. 방영 기간은 짧았지만, 워낙 유머 코드가 독특해서 종영 이후에도 여러 번 리메이크되었으며 여전히 유튜브에서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최양락의 괜찮아유’라는 채널의 한 영상은 300만 조회 수를 바라보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원래 이 코너는 덕암리라는 농촌 마을이 배경이며, ‘양랙이 아부지’(최양락 분) 부부와 경애 아부지’(김학래 분) 부부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이들은 농사일도 서로 돕고 농기구도 나눠 쓰고 음식도 주고받으며, 숟가락 젓가락에 그릇 숫자까지 알 만큼 오랫동안 호형호제하며 한 가족처럼 지낸 사이다.


이처럼 그들은 오랫동안 협력자로 살아왔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해서 늘 비교하고 질시한다. 이를테면 경애 아부지 부부는 양랙이 아부지 부부를 가난하고 게으른 날라리로 여기고, 양랙이 아부지 부부는 경애 아부지 부부를 좀 잘 산다고 거들먹거리는 속물로 여기며 서로를 은근히 무시한다. 대체로 양랙이 아부지 부부는 알량한 도덕적 우위를 경쟁의 무기로 생각하고, 경애 아부지 부부는 어쭙잖은 경제적 우위를 경쟁의 무기로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무기를 바탕으로, 함께 농사를 지으며 필연적으로 협력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면서도 늘 상대방을 자신과 비교하고 약점을 건드리며 면박을 준다. 그들은 이웃사촌이면서도 어느 한쪽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관계임이 분명하다.


두 주인공의 다툼은 양랙이 아부지가 경애 아부지 부친의 친일행위를 폭로하는 순간 파국으로 치닫는다. 양랙이 아부지가 모든 정황이 불리할 때 꺼내 드는 마지막 묘수가 바로 그 친일 카드다. “모두가 어려울 때 경애 할아버지는 그래도 일본 순사 나까무라랑 허구한 날 붙어 다니면서……”라는 말을 시작으로 양랙이 아부지는 경애 할아버지의 여러 친일 행적을 늘어놓는다. 그러면 경애 아부지는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는 것으로 이 코너는 대개 마무리된다. 사촌이 땅을 산 것만으로도 배가 아픈데, 부정한 권력자를 뒷배로 삼아 그 땅을 샀으니 배가 더 아프다는 게 양랙이 아부지의 심정인 듯했다.


오랜 이웃으로 다져온 협력과 비교 대상이기에 품게 되는 질시, 그 두 가지 상반된 태도가 공존하면서 생기는 어긋남이 웃음을 유발하는 요인이다. 그 웃음은 여느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매우 독특한 것이다. 당시 많은 한국인이 그 코너를 사랑한 이유는 이런 웃음 코드에 크게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도시에 사는 지금도 이웃이든 동창이든 반 친구든, 가까운 그 누구라도 늘 협력의 대상이자 경쟁의 대상이기 십상이다. 그러니 보통의 한국인이면 그 구도에 자연스럽게 공감했을 것이다.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니 ‘엄친딸’(엄마 친구 딸)이니 ‘부친아’(부인 친구 아들)니 하는 용어들도 이런 비교와 질시의 문화에서 태어난 신조어 아니겠는가.


<괜찮아유>의 한 장면


3.


한국인에게 협력과 경쟁이 공존하는 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원래 우리 민족은 두레나 품앗이 같은 협력의 문화가 강했는데,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압축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이 나타났고, 이에 따라 비교와 질시의 문화가 만연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학자 이철승 교수는 『쌀, 재난, 국가』에서 이런 문화는 벼농사 문화권에 속한 한국인의 오랜 속성이라고 말한다. 이 교수에 따르면, 전근대 농경시대의 이 같은 경험과 습속은 산업화 과정에서 공장과 사무실로 이전되어 효율적인 산업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교수는 동아시아 문명과 서구 문명의 차이가 벼농사와 밀농사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대전제 아래 우리 문화 속에 숨어 있는 불평등의 기원을 밝혀낸다.


먼저 그는 아시아의 벼농사 문화권과 서구의 밀농사 문화권의 특징을 비교하는 데서 출발한다. 쌀은 완전식품으로 경작을 위해 협업이 필요한 작물인 데 반해, 밀은 불완전식품이며 경작 과정에서 협업이 필요 없는 작물이다. 밀은 불완전한 식품이므로 서구에서는 밀농사와 함께 목축업이 발달했고, 곡물과 유제품이 상품화되면서 상업과 교환경제가 발달했다. 이에 반해 쌀의 자기 완결성은 긴밀한 협력의 사회조직을 탄생시켰다. 벼농사 지대의 개인들은 가족 단위로 마을 공동체에 속해서 농사는 형제·친척·이웃과 함께 지었으나 결과물은 개인이 소유했다. 이러한 ‘공동노동-개별 소유’ 시스템 속에서 경쟁과 비교의 문화가 생겨났고, 이와 함께 질시의 문화도 싹텄다고 이 교수는 분석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기술의 표준화·평준화와 연공제(年功制)의 위계질서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고 한다. 공동노동을 위해 집집마다 동일한 작업 과정이 필요한 한편, 이를 위해 연장자의 경험과 조율능력을 중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핵심 주장은 이처럼 벼농사의 특성에서 ‘공동생산-개별 소유’와 ‘협업-위계-경쟁’이라는 키워드를 끄집어낸 다음, ‘공동체적 유대감’과 ‘비교와 질시의 문화’의 공존이라는 이중적 심리구조를 밝혀내는 데 있다. 이를 파헤치는 과정은 마치 잘 만든 영화 한 편을 보는 듯 매우 드라마틱하다. 질시는 서구 사회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불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 교수는 “구조적으로 강제된 네트워크 안에서 경쟁과 질시의 문화가 격화되면서 신뢰 밑에 불신의 층이 한 겹 더 깔릴 수 있다”면서, “불신이 내재된 협업은 간섭과 상호감시, 의심이 일상화되는 피곤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라고 설명한다.


5.


이러한 농경시대의 전통이 산업사회로 이전되었다는 그의 해석은 매우 독창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농경시대의 전통을 보고 습득한 산업화 세대가 집단주의적 협업과 위계구조를 농촌에서 도시로 이식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기업 조직은 이 업무와 공정의 표준화를 달성하는 공식/비공식적 노동의 연결망을, 서구의 기업 조직이 실현할 수 없을 만큼 극도로 촘촘하고 세밀하게 직조하여 외부의 수요와 공급의 변동에 일사불란하게 대처하는 ‘기민한 생산체계’를 만들어냈다. 이 기술 튜닝의 연결망이 동아시아 자본주의가 세계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경쟁력의 원천이었다.”


나아가 이철승 교수는 이러한 벼농사 문화의 영향으로 동아시아 자본주의는 오랫동안 축적된 협업과 조율의 기술, 협업-관계 자본 덕에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문제는 협업 과정에서 평등화 욕망이 커졌고, 이는 비교와 질시의 문화로 나타났으며, 상대적 불평등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동아시아의 벼농사 문화권 국가들이 복지국가에 소극적인 이유를 신자유주의의 시장 만능주의와 연결한 대목도 인상적이다. 동아시아 국가의 존재 이유는 ‘재난 대비와 구휼’에 그쳤는데, 이는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해야 하므로 국가의 복지 역할에 부정적인 신자유주의 이념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는 생산에 대한 지원에 스스로의 역할을 한정하고 요역과 세금 부담을 덜어주어 농민의 생산 의욕을 돋우어야 한다는 동아시아 군주의 교시는 (중략) 신자유주의 시장 근본주의와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결론적으로 그는 벼농사 체제의 유산들 가운데 협업의 결과인 기술 튜닝(표준화·평준화)과 연공제를 현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제도에 맞게 재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떻게 하면 청년세대의 민주적·수평적 조직문화에 대한 욕구,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대한 공정한 보상에의 욕구를 모두 만족시키면서, 벼농사 체제의 긍정적 유산인 ‘협업과 기예’를 보존할 수 있을까?” 저자는 우리 사회의 과제를 이렇게 말하지만, 아쉽게도 그에 대한 제도적 개선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5.


기호 엄마가 정든 이웃으로 가깝게 지냈으면서도 왜 그렇게 과도한 질투심을 보였는지 이제는 넉넉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나아가 과거에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팠지만, 지금은 옆집 아이가 상을 타면, 친한 동창생의 남편이 승진하면, 가까이 지내던 회사 동료가 고급 외제차를 사면, 오랜 친구의 딸이 명문대를 가면...... 슬슬 배가 아파오는 이유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기호네’와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어느 해에 각자 다른 집으로 이사하면서 이웃사이를 청산했다. 그 이후 내가 서울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기호 아버지의 부음이나 여동생의 혼인 등의 소식을 어머니로부터 간간이 전해 들었지만, 그마저도 어느 순간부터 끊어졌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그 소도시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커피를 마신 게 기호와의 마지막 대면이었다. 그때 우리가 커피와 함께 나눈 것은 필시 앞으로 우리에게 닥쳐올 세상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연락이 끊긴 건 각자 더는 협력할 이유도 경쟁할 이유도 없었던 탓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동안 그도 나처럼 어디에선가 어릴 적 습득한 협력의 기술로 사회생활을 요령껏 헤쳐 나가는 한편, 그 과정에서 생긴 경쟁심으로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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