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다큐드로잉 23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초등학생 시절 나는 두 명의 잘 사는 친구 집에서 번갈아가며 놀았다. 두 친구의 집은 공통적으로 마당이 넓고 방도 많고 놀이 도구도 많았으며, 무엇보다 부지런한 ‘누나’가 있었다. 그 이름은 각각 ‘경애 누나’와 ‘정자 누나’였다. 친누나나 친척 누나가 아니라 실은 식모였던 두 ‘누나’가 부여받은 임무는 상당히 달랐다.
‘경애 누나’는 나들이가 잦았던 친구 어머니로부터 일부 위임받았을 감독권을 과도하게 수행하려 했다. 내가 친구와 함께 노닥거리던 자리에 수시로 나타나서는 목소리가 너무 크다는 둥 TV는 그만 보고 숙제부터 하라는 둥 어머니나 할 수 있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나이 차이도 서너 살밖에 나지 않는 데다 그런 과도한 간섭까지 더해져서, 친구와 ‘경애 누나’의 사이는 늘 좋지 않았다. 내가 없을 때 대판 싸웠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래서인지 ‘경애 누나’는 그 친구 집에서 오래 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면 ‘정자 누나’는 나 하고 친구의 영역 속으로 절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가면 늘 웃으며 과일이나 과자를 내왔고, 가끔 친구가 요청하는 과업도 군소리 없이 수행했다. 우리가 뭘 하고 놀든 간섭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마당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유리창을 깼을 때에도 깨진 유리를 묵묵히 쓸어 담기만 했다. (물론 우리는 그 때문에 친구 어머니로부터 공놀이 금지령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나중에 시집을 가서 잘 산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공지영은 자전적 장편소설 『봉순이 언니』에서, “아직도 봉순이 언니(곧 식모-인용자)는 내가 서러울 때, 내가 따돌림당할 때, 내가 혼자 외로울 때 나를 안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엄마였고 언니였고 그러면서 친구인 그녀는, 내 첫 사람이었다.”라고 했지만, 당시 내 눈에 비친 ‘누나’ 곧 식모는 친누나와 하녀 사이 어디쯤인가에 있는 존재였다. 다만 ‘경애 누나’는 감히 친누나 자리를 넘보았고 ‘정자 누나’는 기꺼이 하녀 자리에 머물렀다는 점이 달랐다.
2.
“한국전쟁은 개인과 가정은 물론 사회 전체에 큰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 인명 피해가 컸다. (...) 50여만 명의 미망인과 부상당한 남편의 부인들, 그리고 장성한 딸들은 가장이 되었다. 아니, 자신들 입에 풀칠하는 것부터 급선무였다. 1952년 14세 이상 여성 인구의 97퍼센트가 경제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반도 역사가 시작된 이래 초유의 상황이었다.” (『삼순이』중 ‘1부 식모’에서 인용)
남의 집에 들어가 살면서 그 집 살림을 돕는 여성은 조선시대에는 노비나 종으로 불렸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후에도 ‘안잠자기’나 ‘행랑어멈’ 등의 이름으로 그 명맥이 이어졌다. 하지만 식모나 하녀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 정착한 것은 위에서 보듯 한국전쟁 직후부터였다. 1953년 4월부터 12월까지 9개월 동안 서울의 한 직업소개소는 3448명 구직자 중 1560명에게 직업을 알선했는데 남성은 막노동 1104명, 여성은 점원 등 44명을 제외한 412명이 식모 또는 하녀였다고 한다. 서울신문사에서 발행한 <서울연감, 1960>에 따르면 서울에만 식모가 9만 명 존재한다는 추정도 있다. 그만큼 당시 식모는 인기 있는 좋은 일자리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는 말하자면 ‘식모의 전성시대’였다.
3.
전쟁은 서민까지 식모를 둘 수 있게 만들었다. 1957년 한 잡지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는 물론 단칸짜리 셋방살이, 판잣집 살림에도 환경과 가정형편은 염두에도 없다는 듯이 서로 다투어 너도나도 식모를 두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식모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자’, <여원> 1957년 11월호). 1966년 ‘조선일보’는 서울의 100가구당 22 가구가 식모 또는 고용인을 쓰고 있으며 약 7만 명의 식모가 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970년대 초에는 식모가 약 24만 6000명으로 증가하여 서울 전체 가구의 31.4퍼센트가 식모를 두고 있다고 했다.
“전 가구의 30퍼센트 이상이 식모를 두는 현상은 선진국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웬만한 중산층도 인건비 때문에 엄두를 못 내는데 당시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인 한국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삼순이』의 저자는 이렇게 물으며, 이는 식모들의 인건비가 매우 낮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식구 중 한 입이라도 덜고,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하는 구직자들이 너무나 많았으며,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된다며 구걸하듯 사정하니 인건비는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민들도 식모를 둘 수 있었다.
4.
1960년대 후반이 되면서 식모의 전성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노동시간은 줄고 월급은 더 많아진 공장으로 농촌의 소녀들이 몰려갔기 때문이다. 식모 시장은 급속히 수요자 우위시장에서 공급자 우위시장으로 재편되었다. 식모 기근시대가 찾아왔고 식모 상전현상이 나타났으며, 식모가 주부의 타락을 부추긴다는 비난과 함께 식모 폐지론도 등장했다. 시간제 식모가 출현하고 호칭도 식모 대신 가정부로 바뀌는 등 사회 제도와 분위기도 많이 개선되었다.
전통적인 식모들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 속에 1970년대 들어 급속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1975년 여성의 해를 기점으로 우리나라의 여성 인권이 크게 향상되어 어린 식모들에게 가해지던 소소한 인권 유린을 죄악시하는 풍토도 식모시대의 종언을 앞당겼다. 핵가족화, 주택 구조의 개선, 가전기기의 발달 등으로 주부들의 집안일이 줄어든 것 또한 중요한 이유였다.
5.
농촌의 소녀들은 왜 도시에 올라가 기꺼이 식모가 되려 했을까? 그 이유는 단순했다. 농사일로는 도무지 돈을 만질 수 없었지만, 도시는 달랐다.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었고, 그렇게 번 돈을 직접 손에 쥘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생애 처음 겪는 짜릿한 기쁨이었다. 모험심이 많고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기회가 넘치는 서울로 향하며 ‘간 데마다 거미줄 치겠냐’, ‘몸 하나 붙일 데 없겠냐’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이처럼 가난한 농경인에서 근대 도시인으로 신분을 상승시키고자 하는 욕망, 그것이 농촌 소녀들을 식모라는 선택으로 이끌었다.
이런 신분 상승 욕망을 가장 극적으로 그려낸 작품 중 하나가 영화 <초우>(1966)다. <맨발의 청춘>과 함께 1960년대 청춘 영화를 대표하는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 대사관저에서 식모로 일하는 영희(문희 분)는 우연히 자동차 정비공 철수(신성일 분)를 만나게 된다. 출세에 대한 욕망이 컸던 철수는 자신을 기업가의 아들로 가장하고 고급 승용차 주인 행세를 한다. 영희 역시 자신을 프랑스 대사의 딸이라 속인다. 프랑스제 고급 레인코트를 입고 신분을 감출 수 있는 비 오는 날만 만나자는 약속 속에, 두 사람의 사랑은 점점 깊어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서로의 거짓이 드러나고, 영화는 결국 파국으로 끝난다.
물론 이처럼 서로의 신분을 감추고 속이는 설정은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허구적 설정을 통해 우리는 당대 사회적 약자들의 강렬한 신분 상승 욕망을 엿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초우>는 단지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한 시대의 욕망 지형을 드러내는 유효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한편, 식모를 들인 도시 주부들의 욕망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순한 노동력 확보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과거 신분 사회에 대한 향수, 다시 말해 종을 부리며 ‘양반’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이 그 이면에 있었다. 다음의 신문 수기는 그 정서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참으로 오랜만에 옛 친구 숙이가 왔다. (...) 난 따끈한 차라도 마시며 서로 헤어졌던 동안의 얘기를 나누어보려고 찻상을 숙이 앞에 놓았을 때,
“이거 국산 홍차로구나. 국산은 맛이 없어.” 찻잔을 거들떠보지 않는 숙이.
“난 네가 왜 동창들의 모임에 늘 빠지나 했더니 식모가 없어 그랬구나.”
싸늘하게 식어가는 찻잔을 앞에 놓고 어떤 조소가 담긴 듯한 단어들이 거침없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경향신문>, 1972년 12월 8일자 —
이처럼 식모를 둔다는 것은 단순히 가사노동을 분담하는 차원이 아니라, 누군가를 ‘거느림’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확인하고자 하는, 일종의 신분 재현 행위였다.
가난한 농경인에서 근대적 시민으로 거듭나고자 한 소녀들의 욕망, 그리고 다시 신분 사회의 위계를 재현하고자 한 도시 중산층 여성들의 욕망. 전자는 자본주의적 욕망이었으나 현실과 괴리된 이상이었고, 후자는 봉건적 잔재에 머무른 시대착오적 환상이었다. 식모라는 직업 혹은 제도는 이 두 왜곡된 욕망이 만난 지점에서 탄생했다. 말하자면 식모는 신분사회의 귀족이 되려는 복고적 욕망과 산업사회의 일원이 되려는 미래지향적 욕망이 절묘하게 만난 약 30년 간의 기형적 현상이었다. 여기에는 산업화(자본주의화)가 압축적으로 진행된 대한민국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결국 식모라는 직업 혹은 제도는 그 삐뚤어진 두 개의 욕망이 각각 다른 배출구를 찾게 되면서 점차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6.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식모라는 제도는 사라졌지만, 그 안에 내포되었던 두 가지 욕망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사회에 잔존하고 있다. 누군가를 부리며 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은 ‘갑질’로, 무엇이든 하며 올라서고자 하는 절박한 욕망은 ‘을질’로 형태를 바꾸어 여전히 사회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식모를 두고 우아하게 살고 싶었던 욕망은 권위주의적 '갑질'로, 식모가 되어서라도 출세하고 싶었던 욕망은 굴종적인 '을질'로 이어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는, "'갑질'을 가능하게 하는 을의 비굴한 저자세"를 '을질'이라고 규정한다.)
‘갑질’과 ‘을질’을 동시에 말해주는 사건이 ‘대한항공 집안 딸의 물컵 투척 사건’이다. 2018년 어느 날, 대한항공 집안의 둘째 딸이 거래처 직원의 얼굴을 향해 물이 든 컵을 집어던졌다. 전형적인 ‘갑질’이다. 이 사건은 어찌어찌해서 세상에 알려졌고 송사로 이어졌다. 그녀는 경찰에서, 자신이 해당업무에 대한 결정권한이 있는 총괄책임자이며, 본인의 업무이므로 업무방해가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결정권한을 가지고 있으니 계약을 맺고 일하는 전문가 집단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해도 된다는 주장이다. 이는 경제외적 강제를 용인했던 유럽의 봉건영주나 귀족의 태도에 다름 아니다.
광고주와 광고대행사의 관계는 갑-을이나 상-하관계가 아니라 의뢰인-전문가의 계약 속에서 서로의 전문성을 존중해야 하는 관계다. 그것이 18세기 말 이후 인류가 피를 흘리며 만들어낸 근대의 가치다.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함축하는 슬로건이 바로 ‘신분에서 계약으로’가 아니었던가. 협력업체의 전문성이 부족했다면 계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협력업체와 새로 계약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더 깊이 따져봐야 할 부분은 ‘을질’이다. 그동안 그 광고대행사는 경제외적 강제를 고스란히 받아주고 고분고분 고개를 숙이며 머슴 노릇을 해왔다고 한다. 20여 년을 그렇게 머리 조아리고 인격 모독을 당연시하며 계약을 유지해왔다니 놀랄 일이다.
‘을질’이 없으면 ‘갑질’도 없다. 장동 김문과 민 씨 일가 세도에 빌붙어 매관매직에 응했던 탐관오리들의 ‘을질’이 없었다면 조선 후기의 피폐한 역사도 없었을 것이다. 일제의 정책에 고분고분 따르며 호가호위했던 친일파들의 ‘을질’이 없었다면 35년의 서글픈 역사는 크게 단축되었을 것이다. 군사정권이나 검찰독재 정권에 엎드려 권력자의 사리사욕에 동조한 부역자들의 ‘을질’이 없었다면 우리는 진작 맑고 건강한 사회에 살고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정찬일, <삼순이-식모, 버스 안내양, 여공: 시대가 만들고 역사가 잊은 이름>,(책과함께,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