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다큐 드로잉 25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동네 어귀, 이발소 옆에 자리 잡은 ‘교동 전파사’ 앞에는 항상 낡은 라디오와 선풍기, 전기난로 따위가 쌓여 있었다. 어릴 적 내가 고장 난 라디오를 들고 자주 찾던 곳이다. 주인아저씨는 대개 내가 건네준 라디오를 처음엔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드라이버를 꺼내 뒷뚜껑을 연 다음 본격적인 수리를 시작했다. 납땜을 하거나 전기선을 새로 잇기도 했고 창고에서 새 부품을 꺼내 갈아 끼우기도 했다. 얼마 후 칙칙 거리던 라디오는 마치 중환자가 병원으로 실려 갔다가 웃으며 걸어 나오듯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다.
1990년대까지도 사람들은 라디오에서부터 흑백과 컬러 TV, 전축과 오디오, 선풍기, 믹서기, 다리미, 드라이기, 전화기, 면도기, 전기장판 등이 고장 나면 어김없이 가까운 동네 전파사로 달려갔다. 전파사 아저씨는 드라이버, 납땜기, 칼 등 간단한 도구만으로 그 모든 것을 고치는 만능해결사였다.
언제부터인가 곳곳에 대기업의 애프터서비스센터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전파사는 하나둘 사라져 갔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고쳐 쓰는 것’에서 ‘버리고 새로 사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소득이 늘어나고 제품가격은 낮아진 데다 폐기물 처리도 쉬워진 탓이었다. 신제품 가격이 수리비보다 더 저렴한 경우가 다반사로 벌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쾌히, 고쳐 쓰는 수고보다 새로 사서 쓰는 즐거움을 선택했다.
2.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는 ‘브리콜뢰르(Bricoleur)’와 ‘브리콜라주(Bricolage)’라는 용어가 나온다. 나는 처음 그 생소한 용어들을 접했을 때, ‘교동 전파사’의 주인아저씨를 떠올리며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브리콜뢰르’란 정해진 계획이나 전문적인 도구 없이, 주변에 있는 잡동사니나 즉흥적으로 손에 들어온 재료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뜻한다. 특정한 목표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재조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다. ‘브리콜라주’는 ‘브리콜뢰르’가 하는 활동, 즉 ‘손에 닿는 어떠한 재료들이라도 가장 값지게 창조적이고 재치 있게 활용하는 기술’을 뜻한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브리콜뢰르의 특징은 주어진 재료, 즉 한정된 레퍼토리 안에서 즉흥적으로 해결책을 찾는다는 점이다. 미리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재료와 도구를 처음부터 새롭게 구하는 현대의 엔지니어링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따라서 브리콜뢰르에게는 미리 정해진 계획이 아니라, 재료 자체가 가능성을 제시하는 창의적인 과정이 중요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시 부족의 신화적 사고를 브리콜라주에 비유하며, 그들의 사고방식이 결코 미개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적의 해답을 찾는 고유한 창의성이라고 보았다. 나에게 브리콜뢰르는 바로 교동 전파사의 주인아저씨였고, 브리콜라주는 바로 그가 지닌 기술이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시인의 야생적 사고가 현대인의 합리적 사고보다 더 창의적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 인류의 역사가 언제나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는 진보 사관을 부정했다. 누가 뭐래도 나에게 ‘교동 전파사’ 아저씨는 S전자 서비스센터의 베테랑 기사보다 더 창의적이고 통섭적인 기술자였다.
3.
전자제품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전파사는 왜 사라졌을까? 사람들은 왜 고쳐 쓰기보다 새로 사서 쓰게 되었을까? 2010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전구 음모 The Light Bulb Conspiracy〉가 그 비밀을 알려준다.
2001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소방서에서 100주년 생일 파티가 열렸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1901년에 제작된 백열전구였다. 1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꺼지지 않고 빛을 밝힌 이 전구는 당시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증명하는 듯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100여 년 전의 기술이 지금의 기술보다 더 앞선 것은 아니었다. 이 전구 탄생 이후, 전구 제조 기술은 오히려 퇴보의 길을 걸은 것일까?
문제는 기술이 아닌 ‘계획’에 있었다. 192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필립스와 오스람 등 세계 유수의 전구 제조사들이 모여 ‘포이보스(Phoibos)’라는 이름의 카르텔을 결성했다. 이들은 전구의 수명을 1,000시간으로 제한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이미 2,500시간에 달했던 전구의 수명을 인위적으로 줄여 더 많은 제품을 판매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렇게 제품의 수명을 의도적으로 짧게 만들어 소비를 유도하는 행위를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라고 부른다.
프랑스 경제학자 세르주 라투슈는 『낭비사회를 넘어서』에서 현대 소비사회를 이끄는 세 가지 핵심 동력으로 광고, 소비 금융, 그리고 계획적 진부화를 꼽는다. 광고가 소비 욕망을 자극하고, 소비 금융이 그 수단을 제공하면, 계획적 진부화는 소비자가 가진 물건을 낡고 쓸모없게 느끼게 해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을 구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제품에 의도적인 결함을 심는 방식보다 광고와 마케팅을 통해 기존 제품을 구식으로 만드는 ‘상징적 진부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최신 스마트폰이 출시될 때마다 내가 가진 제품이 낡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계획적 진부화는 단순한 상술을 넘어 심각한 환경 문제를 야기한다. 짧은 수명을 가진 제품들이 대량으로 버려지면서 자연 자원 낭비와 쓰레기 범람이라는 중대한 생태적 위기를 초래한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무분별한 성장에서 벗어나 ‘탈성장’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희덕 시인은 「피와 석유」라는 시에서 성장으로 인한 환경 파괴의 결과를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렇게 증언한다.
“록펠러는 자신의 석유를 더 팔기 위해/램프와 난로를 아주 싸게 팔았다/ 그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석유 소비가 줄어드는 것, / 매일 1억 배럴의 석유가 세계로 팔려나간다./ 뚫고 또 뚫어라! (중략) 지구는 구멍이 숭숭 뚫린 채 갈기갈기 찢기고 있다”
4.
저스틴 루이스는 『소비자본주의를 넘어서』에서 독특한 제안을 했다. 폐기물 관리와 환경보전 비용을 포함시켜서 가전제품의 생산비를 대폭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TV의 경우, 소재로 사용되는 광물을 채취하는데 들인 비용, 원자재 구매·생산·광고·유통 과정에서 생긴 온실가스 배출 상쇄 비용, 폐기된 TV의 재활용 비용 등을 포함해서 생산비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기업은 생산비를 낮추기 위해 제품을 더 지속가능한 형태로 바꿀 것이고, 소비자는 쉽게 고칠 수 있고 처분 시 부담이 덜한 제품(곧 더 저렴한 제품)을 사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1992년 미국에는 2만 개가 넘는 전자제품 수리점(곧 전파사)이 있었는데, 10년이 지나자 9,000개 밑으로 떨어졌고 계속해서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며, 폐기물 관리와 환경보전 비용이 실제 생산비용에 포함된다면 수리와 조립기술은 다시 유망해지리라 예측했다. 그리고 다시 10년도 더 지났다. 안타깝게도 그의 예측은 몽상이 되고 말았고, 전파사는 <그때를 아십니까> 같은 복고형 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앞에서 소개한 레비스트로스는 원시인의 야생적 사고가 현대인의 합리적 사고보다 더 창의적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인류의 역사가 언제나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는 진보 사관을 부정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른다면, ‘교동 전파사’ 아저씨가 세계적인 기업인 S전자 서비스센터의 베테랑 기사보다 더 유능한 기술자일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예전처럼 동네마다 전파사가 있는 세상이 더 발전한 미래일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응답하라, 전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