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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추천사에 관한 세 가지 해석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반쯤 읽고

by 까칠한 서생

<대온실 수리 보고서>라는 소설을 반쯤 읽은 상태다. 소설을 일 년에 평균 세 권이나 읽을까, 픽션포비아라고 해도 좋을 만큼 픽션을 꺼리는 내가 이 소설을 읽은 건, 여러 경로로 추천을 받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유홍준의 추천사가 주효했다. 인터넷 서점에서 그 책을 검색하면 나오는 유홍준의 추천사는 매력적이었다. 처음엔 대충 읽어보려 하였는데 소설의 구성이 박진감 있게 전개되어 단숨에 독파했다는 얘기다.


그렇게 손에 잡은 소설인데, 갈수록 구성과 문장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누구의 표현을 빌리면 호수 위 달그림자처럼 아련해진다. 급기야 책을 덮고 교보사이트의 독자 평을 읽어봤더니, 호평도 있지만 별점 한 개짜리 혹평이 수두룩하다. 내 느낌이 특별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나더러 매기라면 그래도 별점 두 개나 두 개 반은 줄 텐데 세상에, 한 개라니. 창비의 경쟁사인 문지나 문학동네에서 알바를 풀어 별점테러를 했나 싶기도 했지만, 출판계가 정치판도 아니고 그것도 문학출판사들끼리 그럴리야 없다. 그럼 유홍준의 추천사는 도대체 뭔가? 이걸 계속 읽어 말어?


체호프의 법칙에 따르면, “연극 1막에서 등장한 총은 3막에서 반드시 발사된다.”라고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3막에서 발사될 총은 반드시 1막에서 등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사건이든 묘사든 인물의 등장이든 전체 이야기 속에서 역할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원칙이기도 하고, '총'으로 상징되는 핵심 갈등이 초입에서 반드시 암시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극작가인 안톤 체호프는 연극을 전제하고 이 법칙을 말했겠지만, 소설을 포함한 서사 장르에도 적용되는 금과옥조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대온실...>의 1막(앞부분)에는 아무리 봐도 ‘총’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 개의 스토리가 교차되는 상투적인 구성 속에 몇몇 인물과 배경이 지루하게 나열되고 있을 따름이다. 퉁을 쳐서 짐작해 보면 이 두 가지 스토리가 어떤 반전을 계기로 하나의 주제로 단일대오를 정비하는 것으로 결말이 날 듯하다. 그러나 그게 어떤 사건인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구성이 그만큼 작위적이라는 얘기다.


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투르키예의 국민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나의 인생소설로 친다. 그 작품의 매력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도입부에 있다.



“나는 지금 우물바닥에 시체로 누워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은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 자는 내가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숨소리를 들어보고 맥박까지 확인했다. 그러고는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더니 우물로 끌고 와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여기서 ‘나’는 죽은 몸, 곧 시체다. 시체가 자신의 비참한 현재 상태를 이렇게 담담하고 차분하게 묘사한다는 이 파격적인 발상은 처음부터 독자를 진공청소기처럼 강력하게 흡인하는 효과를 낸다. 카프카의 <변신> 첫대목,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길한 꿈에서 깨어난 뒤, 자신이 한 마리의 끔찍한 벌레로 둔갑해 있는 것을 침대 속에서 발견했다.”를 접했을 때보다 나에겐 더 충격적이었다. 체호프의 법칙에 따라 말하면 이 첫대목이야말로 총의 등장을 뜻한다. 내내 언제 발사될까 하는 긴장 속에 3막쯤에 그 총은 크나큰 굉음과 연기를 동반하며 발사된다. 이 소설에는 그런 총이 여러 개 등장하고 발사되기를 반복한다.


나는 절반이 지나도록 총이 등장하지 않는 <대온실~ >을 덮어 일단 책꽂이에 꽂아두고 하루쯤 다른 책을 읽기로 했다. 하루가 지나도 읽을 기분이 살아나지 않으면 반납할 예정인데, 지금으로선 그럴 가능성이 높다.


남은 과제는 유홍준의 추천사에 대한 해석이다. 그는 왜 이 소설의 구성이 박진감 있게 전개된다며 단숨에 독파했을까?(또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의 소설관이 나는 물론 별점 한 개를 매긴 독자들과 엄청나게 다르다는 점이 그 첫 번째 이유이겠다. 두 번째는 문화재에 관심 많은 그가 이 소설을 소설로 보지 않고 다큐멘터리로 읽었을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대온실의 설치배경과 과정에 대한 호기심으로 끝까지 읽게 된 것을 과장해서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세 번째는 그가 창비와의 오래고 끈끈한 인연으로, 제대로 읽지도 않고 일종의 카피(광고문구)를 써줬다는 의심이다. 물론 이 세 번째는 순전히 나의 알량하고 천박한 의심에 지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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