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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Nov 12. 2023

반복되는 역사

동학혁명을 다룬 소설 <나라 없는 나라>를 읽으며

“지금 이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나라 밖 이리와 살쾡이를 막을 능력이 있다고 보시오?” 전주감영의 수교 정석희는 전봉준의 이 질문에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동학혁명을 다룬 소설 <나라 없는 나라>(이광재 작)를 읽으며, 130년 전과 현재가 어쩌면 이리도 판박이처럼 닮았을까 새삼 놀라고 있다. 대책 없이 외세에 의존하는 무능한 왕(굥)과 그 뒤에서 호가호위하며 사리사욕을 챙기는 탐관오리(윤핵관과 정치검사 등), 왕의 권세를 사취한 교활한 왕비(거니)와 가렴주구에 눈이 먼 척족(기득권세력), 도탄에 빠진 백성(서민과 자영업자), 이 기회를 틈타 호시탐탐 국권강탈을 노리는 제국주의 일본...


다만 다른 점은 비록 실패로 끝났을지언정 그때는 전봉준이라는 걸출한 지도자와 동학이라는 혁명적 사상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는 것 아닐까?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 일은, 제도권 내에 대항세력이 거의 궤멸되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민주당이라는 제도권 정당이 아쉬운 대로 버텨주고 있다는 점.


나는 역사의 진보(발전)를 믿지 않는다. 인간에게 변치 않는 욕망이 있는 한, 역사는 다만 반복될 뿐이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처음엔 비극으로, 다음엔 희극으로”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유물사관의 주창자인 칼 마르크스라는 사실은 대단한 아이러니다. 겉으로는 대표적인 발전사관인 유물사관을 내세운 그도 내심 역사의 반복을 더 신뢰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나라 없는 나라>를 조금 더 소개하기로 하자. 전봉준은 전주감영의 수교 정석희를 거사에 끌어들이기 위해 그의 의중을 타진했다. “수교께서는 조선의 미래를 어찌 보시오?”라고 운을 떼면서 전봉준은 당시의 국내외 사정을 이렇게 요약해서 알려준다.


“밖으로는 이리와 살쾡이가 시시각각 달려들고 안으로는 범보다 무서운 관장들의 기세에 백성이 허물어지고 있소. 임진년에 임금과 조정의 신하들이 밤 봇짐을 싸자 낫을 들고 싸웠소. 그것을 일러 의병이라 했던 모양인데 그런 경험을 얻고도 교훈을 삼지 못하니 임금과 신하가 남한산성에 들렀을 제 더는 나서는 백성이 없었소. 지금 이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나라 밖 이리와 살쾡이를 막을 능력이 있다 보시오? 의지가 있기는 한 거요? 수교께서는 어쩌자는 것인가 물었습니다. 내가 묻고 싶소. 과연 어찌해야 하겠소?”  


이에 정석희는 “역모를 꾀하자는 것인가?”라고 되물었고, 전봉준은 그를 이렇게 설득한다.  


동학혁명을 다룬 드라마 <녹두꽃>의 한 장면


“우리는 백성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로 가려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대원위 한 사람의 힘이나 몇몇 개화당의 힘으로는 구하지 못할 것이오. 하물며 민 씨 일족을 일러 무엇하리오. 호위호식하는 자들이야 배만 채워지면 나라가 넘어간들 눈이나 깜짝하겠소? 하지만 백성은 그로부터 더욱 험한 꼴을 겪을 것이매 어찌 싸우지 않는단 말이오. 그를 일러 역모라고 하면 과연 그렇지요.”


“그것은 어렵고 고단한 길이요. 실패할 거요.”라고 고개를 젓는 정석희에게 전봉준은 재차 설득한다.  


“어렵고 고단한 길이기에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자애로워야 충이고 뭐고 생겨납니다. 백성은 뼛골을 바쳐 조세를 담당하지만 그것이 백성을 위해 쓰인 일이 한 가지나 있었소? 비바람을 막아주는 헛간에도 미치지 못하니 억압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이 세상 너머에 있소.”


결국 전봉준은 조정에 의해 참수되고 정석희는 양호초토사(진압군 사령관) 홍계훈에 의해 죽었지만, 그 누구도 ‘이 세상 너머의 세상’을 앞당기지는 못했다. 물론 지금껏 그 세상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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