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는 신자유주의가 놓은 덫일 뿐인가?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에서 찾은 한 가지 의문

by 까칠한 서생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를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책을 읽을 땐 서사/이야기/스토리의 의미 차이에 유의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서사'는 중립적 의미로, '스토리'는 부정적 의미로, '이야기'는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영어든 독어든 '서사'는 narration(또는 narrative)이고 '스토리'는 story일 텐데,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로 번역된 단어의 원어(독일어)는 Geschichte이며 이에 해당하는 영어는 따로 없을 듯하다. 한국어에서는 이 세 단어가 흔히 혼용된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렇게 받아들였다가는 큰일 난다.


한병철의 다른 어떤 책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매끈한 번역에도 불구하고, 그 점을 역자가 '역자서문'에서 일러두지 않은 점은 적잖은 흠이다. 그러잖아도 벤야민이나 하이데거와 같은 난해한 철학자들이 수시로 소환되어 읽기가 만만치 않은데, 이 책의 키워드인 그 세 단어의 의미 차이마저 헷갈리면 읽기가 더 힘들어진다는 점을 역자는 헤아렸어야 했다. 내 경우, 이 책의 요약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단락에서는 그 의미 차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 animal narrans인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이와 반대로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다.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 중독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

-<서사의 위기> 마지막 단락에서 인용-


한병철의 저작들에서 나는 늘 많은 통찰과 깨달음을 얻는다. 이번에 나온 <서사의 위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늘 머리를 맴도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sns의 기능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게 아니냐는 점. 그에게 sns는 자본과 소비주의 문화가 놓은 덫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에게 (바로 지금처럼) sns는 일정한 한계 속에서도 공유와 소통의 도구로 적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sns가 한병철의 신자유주의 비판 철학을 정당화해 주는 제물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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