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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May 13. 2024

지금, 인생의 봄날


겨울에는 누구나 봄을 기다린다. 하지만 봄에는 여름이나 가을을 기다리지 않고 그냥 이 봄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늘봄'은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소설가 전영택의 호인데, 요즘에는 최상의 보육 및 교육시스템을 뜻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늘봄'을 한자로는 '상춘(常春)'이라 하며, 청와대 영빈관 이름을 '상춘재(常春齋)'라 한 것처럼 귀한 장소에 사용된다.


상춘(늘봄)이라는 말이 있다면 상하(常夏, 늘여름), 상추(常秋, 늘가을), 상동(常冬, 늘겨울)이라는 말도 있어야 맞다. 형식논리 상으로는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들 단어 중 어떤 건 있고 어떤 건 없다. 우선 '상춘'과 '하'라는 단어는 있지만 '상추', '상동'이라는 단어는 없다. 그런데 '상춘'과 '상하'는 두 가지 점이 다르다. 첫째는 '상춘'을 우리말로 '늘봄'이라고 하지만 '상하'를 우리말로 '늘여름'이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점. 둘째는 '상춘'이 이상을 표현하는 단어라면 '상하'는 현실을 표현하는 단어라는 점. '상춘'은 지구상 어디에도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상하'는 적도 근방 지역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타히티나 베트남 등을 '상하의 나라'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상동'은 남극과 북극 근방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데도 그런 단어는 없다. '늘겨울'이라는 말도 없다. '상추'와 이에 해당하는 우리말 '늘가을'은 현실에서든 이상에서든 다 없다. 같은 개념과 발상의 수준에서 왜 어떤 단어는 있고 어떤 단어는 없을까? 이는 필시 언어사회학적 심층분석이 필요한 과제다.


어쨌든 '늘봄'과 '상춘'은 모든 사람의 이상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봄은 지나갈 수밖에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레전드급 대중가요 "봄날은 간다"가 슬플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다 있는 거다. 이 노래는 1951년인가 원조가수 황금심이 처음 부른 이래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 최백호, 장사익, 심수봉, 이선희 등 대한민국의 내로라는 가창력의 소유자들이 누가 더 슬프게 부를지를 두고 경쟁을 벌인 불후의 명곡이다. 이영애와 유지태가 열연한 같은 제목의 영화도 아련히 슬픈 정서를 자극하며 인기를 끌었다. 김윤아가 부른 그 영화의 주제가도 슬픈 정서가 흐르기로는 '원조 봄날은 간다' 못지않다.


봄날은 곧 갈 것이다. 그렇더라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는 시구처럼, 봄은 갔지만 나는 봄을 보내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어질 것 같다. 영원히 지금이 내 인생의 봄날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야 '늘봄'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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