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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May 03. 2024

칼 마르크스가 쓴 『이기적 유전자』

최정균 저『유전자 지배사회』를 읽고


“인간은 유전자의 운반기계다.” 몇 년 전  이 한 마디로 요약되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었다. 자고로 ‘만물의 영장’이라고도 하고 ‘지혜로운 존재’라는 뜻의 호모 사피엔스로까지 불리는 인간이 한낱 유전자의 하수인이나 꼭두각시일 뿐이라니. 이 책을 읽은 사람이면 누군들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이 책에는 동물들 중 유일하게 인간만이 유전자의 이기적인 자기 복제라는 폭정에 반역을 꾀할 수 있다는 내용도 잠깐 언급되고는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는 분명히 ‘인간은 유전자의 운반기계’라는 것이며, 인간이 왜 그리고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설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건 분명하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유전자 중심의 진화론에 관한 책이라면, 최정균 교수의 『유전자 지배사회』는 진화론의 무게 중심을 과감히 인간으로 이동하려는 의도가 담긴 책이다. 인간이 유전자의 운반기계라는 도킨스의 명제 위에서 그 유전자가 현대사회의 정치/경제/문화 등의 영역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하고 있지만, 이 책의 핵심은 인간이 어떻게 유전자 중심의 진화적 속성에 저항하고 이를 극복할 것인지에 관한 근거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책은 “우리는 이러한 (진화에 따른) 생물학적 변화를 ‘자연의 섭리’라는 이름으로 그저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할까?”라고 물은 다음, “아니, 오히려 생물학적 취약성을 깨닫고 이에 대항해 함께 힘을 합쳐 싸우는 것이야말로 문명의 존재 목적이며, 오늘날 우리가 자연이 아닌 문명사회에 살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해 과학계의 최근 학술논문뿐 아니라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등의 인문사회과학 고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거들이 동원되어 설득력을 더한다. 자연과학자가 인문학적 통찰력까지 갖출 경우 무시무시한 지적 파괴력을 지닐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자연과학자가 쓴 책답게 『유전자 지배사회』는 1장부터 6장까지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 ‘사랑’을 통해 가정을(1장), ‘혐오’를 통해 사회를(2장), 신고전파 경제학을 통해 경제를(3장), ‘보수’와 ‘진보’를 통해 정치를(4장), 질병과 노화를 통해 의학을(5장), 성경을 통해 반진화적 기독교사상을(6장)을 들여다보며 유전자의 현대적 의미와 역할을 살펴본다. 그런데 유전자 중심의 진화적 속성에 대한 저항과 극복이라는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해서, 저자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을 내용은 ‘종교: 인간은 태어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6장에 담겨 있다고 판단된다.         


6장에서, 아니 『유전자 지배사회』전체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기독교의 성경을 ‘반진화적 사상의 결정체’로 해석하는 데 있다. “창조설화에 담긴 히브리적 세계관이 추구한 것은 자연의 탈신성화”라면서, “자연이라는 무시무시한 존재의 노예로 스스로를 종속시키던 결박의 사슬에서 인간을 해방했을 뿐 아니라, 자연을 객관적 대상으로서 두려움 없이 있는 그대로 대면하고 탐구하며 활용하게 함으로써 오늘날의 자연과학을 추구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했다”라고 평가한다. 또한 “히브리 민족이 깨끗하게 전멸시켜야 했던 것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적 욕구와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약자들을 희생시켜 가며 이루어진 자연숭배의 문화”라고 단언하면서, “자연은 신이 아니며 야훼의 지배를 받는 대상일 뿐”이고 “자연의 탈신성화를 가장 모범적으로 이행한 이가 다름 아닌 예수”라고 파악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바로 자연으로부터의 인간해방이며 그 끝에 죽음의 정복이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인간으로서 예수가 보여준 것과 같은 신성을 발휘하려면, 자연에서 신성을 벗겨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서 자연성을 벗겨내고 그것에 저항해야 한다. 번식욕과 혐오를 넘어서는 사랑, 차별과 배제가 아닌 포용과 연대, 착취와 탈취가 아닌 가치 창조와 나눔을 추구해야 한다. 자연의 속박에 고통스러워하는 많은 이들을 해방시키고, 우리의 후손에게 더 공정하고 진보된 세상을 물려주며, 인류가 오래도록 생존하고 번성하도록 해야 한다.”  


위 인용문은 6장의 핵심이면서 이 책 전체의 결론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렇다고 저자가 기독교적 사상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학자라고 보면 오산이다. 저자는 분명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연의 창조주 따위는 없다”면서, “성서에서 종교적 도금을 벗겨내면 진짜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 인간이 바로 창조주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유전자 지배사회』의 띠지에는 이 책이 “마이클 샌델이 쓴 『이기적 유전자』”라고 적혀있지만, 내가 보기에 “칼 마르크스가 쓴 『이기적 유전자』”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유전자의 폭정과 억압을 타도하자며 혁명을 선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이기적 유전자』에서 도킨스가 기존 진화론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로 선보인 ‘밈(meme)’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밈 개념은 『이기적 유전자』가 발표된 1976년 이래 활발히 논의되지 못하다가, 심리학 기반의 과학 저술가 수전 블랙모어에 의해 1999년에야 비로소 The Meme Machine이라는 이름의 저서로 정리되어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밈: 문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복제자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블랙모어에 따르면, 밈 이론은 기존의 진화론이 난감해하거나 머뭇거리는 많은 문제를 단칼에 처리해 준다. 비혼과 비출산 문제, 그리고 인간의 이타성 문제뿐 아니라 인터넷 미디어의 등장과 확산의 이유도 밈의 관점에서 보면 명쾌하게 해명된다. 그 이유는 수직적 전달만 가능한 유전자와는 달리, 밈은 수평적·사선적 전달이 가능한 복제자이기 때문이다. 즉 유전자가 자식에게만 전달되는 복제자라면 밈은 자식은 물론 친구, 동료, 선후배 등 지인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는 복제자라는 것이다. 전달 수단이 생식이 아니라 모방이므로, 이론상으로는 심지어 부모나 조부모를 향한 상향식 전달도 가능하다. ‘밈’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가 『유전자 지배사회』라는 틀 속에서는 어떻게 해석될지 궁금해진다.      


※서평단의 일원으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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