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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의자 Jul 29. 2020

자서전 읽기의 불편함

살만 루슈디, 조지프 앤턴

1989년 내가 기억하는 한 문학과 관련하여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특정 종교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소설을 쓴 작가를 향해 파트와 즉 살인 명령이 내려졌다. 명령을 내린 이는 이란의 호메이니였고 그가 적으로 지목한 이는 인도 출신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였다. 루슈디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렸고, 영국과 이란 사이의 외교 관계는 악화되어 단교로까지 이어졌다. 호메이니가 죽은 이후에도 파트와는 철회되지 않고 십 년 이상 지속되었지만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파트와가 철회되었다는 소식은 듣고도 특별한 감상은 없었다.


<조지프 앤턴>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살만 루슈디의 자서전이다. 자서전이라고 하지만 내용의 대부분은 파트와 이후 십여 년 동안 벌어진 일들이다. 주로 3인칭을 사용하기 때문에 루슈디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처럼 읽히기도 한다. 책 제목 조지프 앤턴은 그 기간에 사용한 가명으로 조지프 콘래드와 앤턴 채홉에서 따온 이름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루슈디가 조지프 앤턴으로 살았던 시절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루슈디 소설 중에서 재미있게 읽은 작품은 <한밤의 아이들> 뿐이다. 부커상을 받았다는 이 소설은 인도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파키스탄과의 갈등, 방글라데시의 독립, 인도의 독재 등 인도 아대륙의 중요한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다루었다. 파트와를 불러올 만큼 이슬람을 분노하게 했다는 소설 <악마의 시>는 몇십 쪽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이야기의 설정이나 전개가 낯설어 따라가기 어려웠다. 언제 시간 나면 천천히 읽어봐야지 하고 미루어둔 지가 20년은 넘은 것 같다. <무어의 마지막 한숨>은 그나마 펼쳐보지도 못하고 책장에 꽂혀 있다.      


사실 이 책을 구입하면서 기대했던 바가 없지 않았다. 인도의 이슬람 집안에서 태어나 가족들은 파키스탄으로 이주했고 작가는 어릴 때부터 영국의 고급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 <한밤의 아이들>에서 받은 역사에 대한 독특한 인식, <악마의 시>가 그토록 파장을 일으킨 것에 대한 저자의 입장 등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런 큰 기대와 달리 이 책은 자신이 숨어 살면서 겪었던 일들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었다. 뭄바이에 살았던 그의 가족은 원래부터 독실한 이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파키스탄으로 이주는 루슈디와 상관없이, 종교와의 관계도 애매하게 인도에 남은 가족들에 의해 이루어진 ‘남의 일’이었다.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자신의 작품 <악마의 시>에 대한 언급이 매우 적다는 저이었다. 문학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세력에 대한 비난과 소설을 어떻게 구상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많지만 ‘그들’이 왜 그리 분노했는지에 대한 작가 나름의 성찰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파트와가 처음 공표되었을 때 작가의 느낀 공포가 어느 정도였을지는 사실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루슈디는 죽은 목숨이다!’라고 외치는 시위대를 매일 목격하고, 출판사와 서점에 폭탄 테러가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어떤 심정으로 살았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열 살짜리 아들을 만나기 위해 런던 시내를 돌고 돌아 안가에서 접선해야 했던 마음은 또 어땠겠는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주거지를 자주 옮겨야 하는 불편함, 경호원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불편함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작가는 아마 이 자서전을 통해 십 년 이상 자신이 겪었던 이러한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작가가 겪었을 이런 특별한 고통에는 대부분의 독자가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소설이 자신의 신념과 다른 내용을 담았다고 사형 명령을 내리는 전근대적인 발상에 대해서도 함께 분노하게 된다.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 그런 작가를 포용하고 보호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나아가 도그마가 갖는 일반적인 위험과 그런 위험에 대응하는 태도는 무엇일까에 대해서고 생각하게 된다. 루슈디라는 작가의 경험이 문학의 자유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생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도 갖게 된다.      


그러나 피해자의 자기 토로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자서전을 읽는 일은 불편하다. 책 1/3을 넘어서면서 이런 느낌은 더욱 분명해졌고 어느 부문이 나를 불편하게 했는지 자꾸 돌아보게 되었다. 책을 덮으며 <조지프 앤턴>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무척 ‘이기적인 책’이라는 것이었다. 경솔해서인지 열정이 과해서인지 작가는 자신이 상대하는 사람의 입장을 깊이 고려하지 않는다. 사업상으로든 애정, 우정으로든 그와 관계 맺는 사람에 대해 작가는 최소한의 배려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기 마땅히 배려와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생각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위협받는 사람, 가장 오해받는 사람이었을 수 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노력하는 일은 당연하고 바람직하다. 하지만 당사자가 모든 사람에게 그런 대접을 받으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루슈디에게 생명의 위협이 닥쳤건 아디건 그들에게는 그들의 삶을 계속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파트와 기간에 만난 사람들을 일일이 평가하려 한다. 주인공 루슈디에게 어떻게 했는지 그래서 루슈디의 기분이 어떠했는지가 아주 상세하게 서술된다. 이것이 인물을 평가하는 거의 유일한 기준이다. 루슈디를 그렇게 대했던, 어쩌면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책 어디에도 없다. 안가에 숨어 세상 사람들이 어떤 사정으로 살아가는지 짐작하기 어렵더라도 누구나 사정이 있다는 생각쯤은 해야 어른 아니겠는가.      


불편함의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것 같다. 자기 성찰이 없는 자서전 읽기는 견디기 힘든 일이다. 무신론자로서 나는 종교의 맹신이 인류에게 큰 해악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속의 신을 넘어선 조직으로서의 종교는 정치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도 무신론자라면 마땅히 종교의 ‘현실적인’ 이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이 종교에 끌리는 이유, 종교가 현세에 미치는 영향,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과 버리고자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악마의 시> 역시 이런 현실의 논리 속에 놓인 책일 뿐이다. ‘죽어가는 노인네’의 망령으로 취급해서는 아무런 답도 얻을 수 없다. 자서전 안팎의 루슈디는 내내 세상에 대해 감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럴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반응으로 가득한 800쪽 가까운 책을 읽는 독자는 조금 피곤하다.     

 

다른 이야기지만 리얼리즘 소설에 대한 모더니즘 소설의 비판 중 하나는 단일한 목소리가 갖는 위험성이다. 하나의 목소리, 한 사람의 서술자로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관적인 목소리가 전하는 진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때도 주관적인 목소리가 입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다양한 목소리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서술자 교체나 의식의 흐름과 같은 기법은 주관의 아집과 편견에 빠지지 않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다. 이런 논리의 연장으로 생각해보면 자칫 자서전의 목소리는 주관적이고 단선적인 목소리를 가진 최악의 서사가 될 수 있다. 감정과 기분을 앞세우고 성찰이 부족하다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자서전 읽기는 늘 조심스럽다. 실망하지 않고 끝을 맺기 매우 어려운 독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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