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국에서 읽다
수국의 계절이다.
나만의 체감인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부터 수국 전성시대가 열린 것 같다. 수국 정원 카페도 많이 생기고, 지역마다 수국 군락지를 조성해 여행객들을 불러 모은다. 다양한 색감의 다양한 수국은 화려하면서도 귀티가 난다. 뜨거운 여름날 짜증 나는 운전길에 수국 만연한 길을 만나면 짜증이 잠시 물러난다. 더군다나 '수국' '수국'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느껴지는 시원한 단비 같은 청량감이 뇌를 환기시켜 주는 것 같아 여름날 수국은 나에게 힐링 요소다.
제주도 동쪽 성산포와 월정리 사이의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수국 만연한 길을 만날 수 있다. 바다를 바로 옆에 두고 편도 일 차선 도로의 좁은 길에 무성하고 화려하게 다발다발 핀 수국을 급작스럽게 만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브레이크를 밟게 된다. 그리고 주차할 만한 공간이 없나 살피게 된다.
그러다가, '사려니 숲길'에서 또 다른 수국을 만났다. 고즈넉하고 깊은 숲길을 따라 걷는데 보라색 파란색의 작은 꽃들이 하나둘씩 보이기에 이건 무슨 꽃인지 했더랬다. 점점이 보이던 꽃들이 어느새 숲 속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매혹'당했다고 해야 할까. 이 꽃이 '산수국'임을 알았다. 제주 자생식물로 주로 습한 곳에서 자란다고 했다.
산수국을 보고 난 후 그 잔상이 계속 남았다. 깊은 숲에서 만난 산수국 길은 몽환적이라고 할까. 아마 나만이 오롯이 그 공간에 있었다면 다른 세계로 들어왔다고 착각할 법했다. 수국의 계절이 왔고,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수국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산수국만은 쉽게 만나지 못했는데, 곤지암 '화담숲'에 갔다가 산수국 군락지를 보고 크게 환호를 내질렀다. 세상에 여기에도 네가 있었다니!
그런데 산수국의 꽃말이 '변하기 쉬운 마음' 이란다. 변하기 쉬운 마음~ 변하지 말라고 하는 말일까. 보기가 쉽지 않아서 그리워하다 마음이 변해서 그런 걸까. 여하간 꽃말마저 내 마음을 헤쳐 보는 것 같아, 그 앞에 한참 머물며 변하지 않는 내 마음을 보이고자 했다.
어느 산사에서 만난 산꾼 시인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이렇게 혼자 지내면 외롭지 않으세요?"
등산객이나 방문객들이 있다고 해도 산속에서 홀로 지내는 건 외로울 것 같았다. 그는 외롭진 않다고 했다. 오히려 산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핸드폰의 연락처들을 싹 정리했다고. 산에 있으면 하루 종일 할 일들이 아주 많아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라고. 그러더니 그는 멀리 시선을 향하고서,
"그런데..."
그런데 뭐요?
"그런데 그리움은 생각보다 힘들더군요."
외로움과 그리움!
홀로여서 생기는 외로움은 견딜 수 있지만,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은 오늘 다시 차오르고 내일 다시 차오른다는 것. 인생의 어느 시절 그냥 떠난 보낸 사람에 대한 미안함 가득한 그 그리움이 오죽했으면 그럴까. 차를 마시며 시인의 지난 그리운 사연을 들었다.
살다 보면 떠나보낸 이도 있고, 떠난 일도 있고, 여러 이별도 겪지만 느지막한 나이에 이렇게 누군가를 '그리워' 할 수 있을까. 내가 미안하게 상대를 떠나보내서 그렇다고 해도.
'변하기 쉬운 마음' 산수국을 마주 보며
'그리움'이란 무엇인가를 내내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