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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러 Sep 05. 2020

사람이 좋은 스트라스부르

#1. 스트라스부르 2014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운이 좋게도 매 여행지마다 최소 한 명씩은 인상적인 사람들을 만나왔다. 함께 여행을 갔던 분도 있고, 그저 숙소에서 대화만 나눈 분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여행지 자체보다 더 강렬한 적은 없었다. 스트라스부르는 유일하게 도시보다 사람이 더 기억나는 도시다. 그곳에서 만났던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던 외국인 현지인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분이 베풀었던 친절과 희생을 잊으래야 잊을 수 없다. 들렀던 도시들 중에서 가장 평이하고 한 게 없던 도시지만, 그분 덕분에 스트라스부르는 여전히 따스한 도시로 기억되고 있다.




중간 도시 스트라스부르


 국적이 수 백번도 넘게 바뀐 도시가 있다. 바로 스트라스부르다.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이 도시는 수 백 년의 시간 동안 프랑스의 땅이 되기도 하고, 독일의 땅이 되기도 했다. 그랬기에 현재는 프랑스의 땅이지만, 도시 전반에 걸쳐 양 국가의 색채가 공존하는 도시라고 한다. 여행책에서 이런 설명을 봤을 때, 어딘가 모르게 묘한 친밀함을 느꼈다. 자칫하면 어중간할 수도 있는, 두 이질적인 요소의 조화는 항상 매력적인 것 같다. 정확히는 내가 그런 것들에게 큰 매력을 느끼는 걸지도.


 스트라스부르에 관한 내 지식과 준비는 딱 여기까지였다. 숙소 하나만 딸랑 예약한 채, 이 도시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없이 이곳에 도착했다. 도착했던 시간은 이른 오후였다. 이 도시에서는 고작 하루만 머물기 때문에 숙소에 짐을 간단히 풀고 바로 길을 나섰다. 여행책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이 도시를 거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길가에 보이는 자전거 대여소로 가서 자전거를 빌린 뒤 무작정 페달을 밟았다. 목적지도 없는 주행이었다. 그저 길을 달리다가 마음에 드는 길이 나타나면 방향을 바꾸는 식으로 도시를 질주했다. (지금의 따릉이처럼 거리 곳곳에 자전거를 대여할 수 있는 대여소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조금 몰려있는 길을 발견했다. 한적한 도시였지만 유독 몇몇 사람들이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통행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장기 여행자의 직감이 발동했다. 저들 역시 여행객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전거로 들어가기에는 길이 살짝 좁아서 옆에 자전거를 대고 걸어서 가기로 했다. 사람들을 뒤따라 걷다 보니 꽤 근사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통일성을 띄는 건물들


 독일이나 프랑스의 건축 양식에 대해 아는 게 아니라, 어느 건물이 어느 국가가 지배할 시절에 지어진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들어선 골목길은 통일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하이델베르크와 산토리니의 마을처럼 말이다. 그것도 아주 예쁘고 단아하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은 '쁘띠 프랑스'라고 스트라스부르를 대표하는 주요 관광지 중 하나였다. 작은 프랑스라는 그 뜻처럼 이 거리는 프랑스 특유의 오밀조밀하고 전원적인 분위기가 충만했다. 프랑스의 분위기가 어떤 건지는 몰랐으나, 독일을 다녀와본 결과 이 양식들은 독일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랬기에 반대로 이것이 프랑스의 건축 양식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흐르는 강 옆에 바짝 붙어있는 건물들


 도시와 동떨어진 분위기의 골목길을 걷다가 다시 세워둔 자전거로 돌아왔다. 괜스레 기분이 좋은 걸 어쩔 수 없었다. 아무 계획 없이 도착한 이곳에서 뜻하지 않게 쁘띠 프랑스라는 유명한 곳에 왔고, 이곳에서 프랑스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이제 막 파리로 가기 직전에 일종의 프랑스 시사회를 온 느낌이다. 그렇게 이 상황을 조금 미화시켰다. 그래서인지 페달을 내딛는 발걸음이 아까 전보다 힘차고 활기차게 변한 것 같다. 이 기분을 만끽하고자, 영화 속 주인공처럼 자전거를 타며 하늘을 바라보다 저 어딘가에 우뚝 솟아있는 붉은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여행자의 촉이 왔다. 저기 역시 유명한 관광지일 것이라고. 핸들을 돌려 건물이 솟아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은 아까 쁘띠 프랑스보다도 더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단순히 현지인들로만 이루어졌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시선을 빼앗긴 것도 잠시, 한눈에 담기에도 모자랄 만큼 거대한 건축물이 내 시선을 압도했다.

 

카메라에 담기 힘들 정도로 큰 성당


 태어나서 이렇게 큰 성당은 처음 본 것 같다. 유럽에는 이 정도 크기의 성당이 흔하거나 아니면 이곳이 꽤 유명한 성당이거나 둘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근처를 둘러보며 성당의 이름을 찾은 순간,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찾아왔다. 프랑스가 알파벳을 아주 이상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면, 이곳의 이름은 '노트르담 대성당'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노트르담 대성당은 파리에 있었다. 무계획으로 가득 찬 내 여행에서 그래도 몇 안 되는 계획 중 하나는 파리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노트르담 성당은 파리에 있다는 내 기존 지식에 정말 반대되는 사실에 내 인식은 부조화에 걸렸다.


 이번만큼은 그저 느끼는 것이라 제대로 된 사실을 알고 싶어서 성당 근처에서 여행 바우처 같은 것들을 찾아봤다. 아마 나 같은 혼란에 빠진 사람이 많았나 보다. 바우처에는 이곳 역시 파리의 성당과 동명의 성당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이 하나만 있다는 내 상식이 깨져버리는 순간이었다. 후에 파리의 성당도 방문했지만, 이곳 스트라스부르에서 먼저 봐서 그런지 내 기억 속에는 스트라스부르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좀 더 강렬하게 기억되고 있다.


 과연 저렇게 큰 건물의 내부는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의문에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황동색으로 물든 성당은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뽐내고 있었고, 그에 압도당했기 때문이었을까? 내부에서는 신앙이 없는 나조차도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되는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 미사가 없는 시간이라 내부를 돌아다니고 좌석에 앉는 게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나도 모르게 조용히 자리에 앉아, 기도하는 시늉을 해봤다. 몇 백 년 전에 건축된 이 건물 안에서, 나와 다른 시간대를 살아갔지만 그들과 같은 행동을 해보자는 마음에서였다.


어두웠던 성당 내부


 어떤 기분인지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음이 편안해지고, 겸손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것이 신앙을 가진 자들이 기도할 때마다 드는 마음일까? 익숙하지 않은 느낌에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에서 나갔다.




낯선 사람, 좋은 사람


 도시를 쓱 둘러보고 자전거를 반납한 뒤, 맥도널드에서 버거를 포장해 숙소로 들어왔다. 긴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바로 자전거를 달려서 그런지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버거를 먹고 조금 쉬다가, 뒤늦게 숙소로 체크인 한 한국인 분들과 짧게 인사를 나눈 뒤, 저녁 마실을 나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이때 한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결과적으로는 이 도시에서 만의 강렬한 경험을 알게 해주는 시발점이었지만, 심각한 실수임은 분명했다. 숙소로 들어오는 마스터 키를 방에 두고 온 것이다.


저녁 시간의 스트라스부르


 내가 이걸 깨달은 건 두 시간가량이나 도시를 방황하다가 숙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보람찬 하루를 마치고 숙소 문을 열려고 하는데 키가 없던 것이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 걱정이 없었다. 분명 숙소에 다른 여행객 분들이 계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밤 11시. 일찍 주무시는 분들에게는 민폐일 수도 있지만,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아무리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11시에 모든 투숙객이 숙소 밖에 돌아다닐리는 없었다. 사실 집주인에게 전화를 하면 되는 거였지만, 이 글을 처음부터 읽은 분들은 아시다시피 내 전화기는 여행 내내 먹통인 상태였다. 심지어 여긴 도심 한복판이라 누군가에게 전화를 빌려서 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 수도 있었지만, 숙소 번호가 적힌 노트는 내 방 안 침대 위에 고이 얹혀있는 상태였다.


숙소로 오기 직전에 크리스마스 마켓을 보며 좋아했던 기억은 이미 사라졌다


 그렇게 시간이 10분 정도 흐르고, 추운 날씨가 내 몸을 엄습했다. 초조해진 마음에 초인종이 아닌 문들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더욱 기가 막힌 건 안에서 사람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는 소린지 뭔지 분명 인기척은 있었다. 문을 좀 더 세게 두드렸으나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도, 누구냐고 물어보는 말도 없었다. 처음에는 망연자실한 마음이, 대답 없는 사람들을 향한 분노가 되었다가, 시간이 점차 흐르며 서러움으로 변해갔다.


 연고지 없는 이곳에서 숙소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밖에 갇혀버린 것이다. 근처 호텔을 찾아서 그냥 방을 구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내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방 안에 들어있었다. 추위는 점점 심해졌고 몸과 마음 모두 자포자기하는 그때, 누군가가 나타났다.


 우리 숙소는 1층이었고, 그 위에 층들은 현지인들이 거주하는 평범한 주택이었다. 늦은 시간에 퇴근하는 한 프랑스인 남성분이 계단을 통해 자신의 집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었다.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자 내 행동은 대담해졌다. '익스큐제 모아'라는 떨리는 목소리에 내 본연의 소심함이 묻어났지만, 난 용기를 내어 그분께 내 사정을 설명했다. 같은 건물에 사니 혹시라도 집주인이랑 아는 사이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나 프랑스나 현대인들은 다들 데면데면한가 보다. 그분은 여기에 한국인이 사는지도 몰랐다고 하셨고, 어떻게 연락처를 구할 방법도 모른다고 하셨다. 하지만 내 처지가 딱해 보였는지, 그분은 내 숙소로 가서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며 프랑스어로 누구 없냐고 묻기 시작했다. (대충 그런 뜻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지인의 도움에도 저 굳게 닫힌 문은 꿈쩍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분은 내 방이 어디냐고 물었고, 나는 그분을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와 벽면을 가리키며 '저곳이 내 방이다'라고 설명했다. 1층이었지만, 현관 계단이 높은 까닥 에 실제 높이는 아파트로 치면 2층에 달하는 높은 곳이었다. 이때부터 우리 둘의 기이한 행각이 시작됐다.


 그분은 창문이 열려있으면 창문으로 들어가 보자고 하면서 나를 목마 태웠다. 성인 남성의 목마를 탄 건 거진 20년 전 우리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텐데, 유럽에 와서 낯선 프랑스인의 목마를 탈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24살이 되어서. 처음에는 민망했지만, 어떻게든 방에 들어가야 한다는 집념에 내 행동은 점점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작은 키는 그분이 목마를 태워도 창문에 닿지 않았다. 그분은 기어코 자기 어깨를 밟고 올라가라고 하셨다. 나는 신발을 벗고 그분 어깨를 밟았지만 그래도 내 키는 창문에 닿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간 기이한 행각을 벌이다가, 이러다가 둘 중 한 명이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분을 향한 내 미안함은 이미 극에 달해서 도저히 그분을 이 늦은 시간까지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시간은 벌써 자정을 향해있었다.


 나는 그분께 어떻게든 들어가 볼 테니 집에 가시라고 했지만, 그분은 어떻게 나를 혼자 밖에 두고 집에 가냐며, 다시 한번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제야 야속하던 문이 열리고 집주인이 나타났다. 원망스러운 마음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너무 커서 눈물이 찔끔 났다. 도대체 안에 있었으면서 왜 한 시간 넘게 문을 안 열어줬냐고 하자, 늦은 시간에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이 무서워서 그랬다고 한다. 함께 머물던 투숙객분들도 두려움 때문에 그저 방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별 걸 다 무서워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한 시간 동안 얼마나 무서웠을까라는 생각에 허탈해졌다. 그저 키를 안 갖고 나간 내 잘못으로 끝내는 게 제일 아름다운 결말이었다.


 잠시 집주인과 인사를 나눈 프랑스 남성분은 나에게 좋은 밤 되라고 하며 올라갔다. 나는 어떻게든 그분께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지만, 내 고맙다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그분이 쾌활하게 웃으며 됐다고 하시며 쏜살같이 계단을 타고 올라가셨다. 마음이 조금 찝집했지만, 내 몸과 마음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기 때문에 다른 생각 할 겨를 없이 대충 씻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니, 6년이 지나는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생각해봤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유럽은 여전히 인종차별이 조금은 남아있는 나라다. 설사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종차별자가 아닐지라 하더라도, 처음 보는 낯선 외국인을 위해 자신의 어깨에 그 사람을 태우고, 발을 밟게 해 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는 한국에서 누군가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그런 조건 없는 친절을 베풀 수 있었을까? 양심에 손을 대고 말하자면 그 당시에는 철저하게 무시했을 것이다.


 여행자에게 베푼 낯선 이의 친절은, 또 다른 여행자에게 낯선 이가 친절을 베풀게 한다. 그때 그분을 만난 이후로, 나는 한국에서 만나는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친절함을 드리려고 노력한다. 그것만이 그분이 주신 선한 마음을 갚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굳이 여행뿐만이 아닌 것 같다. 사람마다 다를 순 있겠지만, 나는 내가 친절함을 베푼 대상이 나에게 은혜를 갚는 것보다, 다른 이에게 내가 해준 것과 같은 친절함을 베풀 때 마음의 보상을 받고는 한다. 그렇게 선한 마음이 전해지고 전해지다 보면 언젠가는 그 마음이 또다시 나에게 되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영화 같은 상상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 아닌가 싶다.


 나에게 어깨를 내어주신 그분의 친절함은 쁘띠 프랑스의 아름다운 주택들보다도, 거대한 노트르담 대성당의 웅장함보다도 강렬했다. 나에게 스트라스부르는 사람이 남는 도시였다. 그리고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그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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