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리 2014 (1)
파리를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파리니까. 유럽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도시 중에서도 가장 상위권을 차지하는 도시. 아마 유럽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의 버킷 리스트에 빠짐없이 들어가는 도시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그러한 곳이었다. 가서 무엇을 할지는 역시 다른 도시들처럼 하나도 정해놓지 않았지만, 말로만 들어오던 파리가 어떤 곳일지 너무 궁금했다. 추가로 내가 좋아하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들의 무대를 장식하는 곳이라는 것도 기대감을 증폭시키는데 한 몫했다. 조금 더 여유로울 때, 한 번쯤은 다시 방문하고 싶은 그런 도시에 발을 내디뎠다.
파리에 와서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노트르담 대성당, 에펠탑, 그리고 루브르 박물관이 고작이었다. 애초에 그 셋 말고는 파리에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꼭 당부하신 말, '퐁피두 센터는 꼭 가보렴'. 파리라는 이유로 다른 도시들보다 필요 이상으로 일정을 잡아놓은 탓에, 들를 곳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은 희소식이었다.
파리에도 역시 늦은 밤에 도착했다. 이쯤 되면 그냥 모든 도시에 늦은 밤에 도착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늦은 시간에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졌나 보다. 복잡한 숙소 주소 때문에 길을 잃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에 있는 사람에게 주소가 적힌 메모장을 보여주며 길을 묻는 게 당연해졌다. 내 부탁을 받은 아주머니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자세한 위치는 도저히 모르겠다며 핸드폰을 빌려줬다. 그분이 빌려주신 핸드폰으로 숙소에 전화를 걸었고, 덕분에 숙소를 빠른 시간 내에 찾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숙소에서 단잠을 자고 일어난 뒤, 첫 목적지인 퐁피두 센터로 발걸음을 향했다. 에펠탑은 저녁 시간에 보는 것이 더 예쁘다는 얘기를 들었고, 노트르담 대성당과 루브르 박물관은 다음날 신청한 투어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퐁피두 센터는 숙소에서 걸어서 1시간 이내에 있는 거리였다. 마침 아침이니 잠도 깰 겸 걸어가기로 했다. 사실 파리 중심가는 걸어서 모든 곳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 난 그것도 모르고 우연찮게 잡은 숙소의 위치가 완벽하다고 혼자 뿌듯해했다.
퐁피두 센터까지 걷는 동안, 분명 유명한 이름이 있을 법한 건물과 거리들을 지나쳤다. 막연한 궁금증이 일기는 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냥 못 본 척하기로 했다. 파리에 있다는 사실과 그 아침 공기들을 만끽하는 것으로 이미 충분히 즐거웠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에 출발해서 그런지, 회사로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사람 사는 게 참 다를 것 하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크로스백을 하나 메고 있던 터라, 나도 왠지 이 사람들과 같은 파리지앵이라는 착각마저 들었다. 기분 좋은 착각이었다.
퐁피두 센터는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외견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전시관이라길래 조금은 단정한 건물일 줄 알았건만, 겉에서만 보면 무슨 공장, 혹은 아직 건축 중이라 미완성인 구조물로 보였다. 외벽에 설치된 안내문이 아니었다면 정체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파리의 사람들은 아침부터 부지런했다. 여행객인지 현지인인지는 몰랐지만, 가히 백 명은 넘는 사람들이 입장권을 구매하기 위해 줄 서 있었다. 조금 더 일찍 올 걸 그랬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저 주변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센터 안에는 정말 가지각색의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확실히 현대 미술과 관련된 곳이라 그런가, 통통 튀는 매력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획일적이지 않았으며, 틀에 박히지도 않았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음식을 먹는데 신맛이 느껴지다가, 엄청 매워졌다가, 극도로 달콤해지는 그런 맛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세련됨을 잃지 않는다는 게 경이로웠다. 그리고 워낙 넓었기에, 한 번만 와서는 그 매력을 모두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했던 것 같다. 이곳에 올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몰랐기에 꽤나 긴 시간을 센터 안에서 보냈던 것 같다.
체감상 한두 시간이 넘어갈 때쯤, 슬슬 허기가 올라왔고 이제는 나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퐁피두 센터 꼭대기에서 파리의 전경을 한 번 쓱 훑어본 뒤, 아쉬움 마음 접어두고 센터 밖으로 나왔다.
센터 앞에는 가족들이 분수대 앞에서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물에 손을 담그며 해맑게 웃어댔다. 기분 좋은 여유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심지어 작은 분수대에도 여러 미술품이 설치되어있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저것들도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아마 맞을 것이다).
평소라면 저런 분수대에 있는 조각품들이나 설치물들을 보며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에 퐁피두 센터에서 다녀와서 그런지, 근처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세련된 예술 작품들로 보였다. 어쩌면 파리가 그런 곳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들을 예술처럼 보이게 하는 마법을 지닌 도시. 도시 자체를 예술이 감싸고 있는 도시.
보통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나 역시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이지만, 가끔은 몰라도 보이는 그런 것들이 있다. 오히려 모르고 봐도 괜찮은, 모르고 봐야 더 괜찮은 그런 것들이 있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퐁피두 센터는 내게 그런 곳이었다. 그 어떤 학문적 배경 지식이 없었어도 충분히 예술적 감각을 자극했고, 그 후에 보는 것들에게도 그런 프레임을 씌워줬다. 그냥 봐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 어쩌면 이게 현대 미술이 지향하는 바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퐁피두 센터를 나온 뒤에는 그냥 정처 없이 도시를 걸었다.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그냥 거리를 둘러보기만 해도 좋았다. 거리에서 보이는 아주 조금 특이한 것도 다 예술로 보이는 마법이 일어났다. 물론 그전에 허기진 배를 채워야만 했다.
2020년의 나는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다. 매우 즐긴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성별에 따라 선호하는 음식이 갈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달달한 것만 찾아서 즐기는 남자는 처음 본다는 말도 몇 번 들었다. 단언컨대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이때, 파리에서의 식사가 그 변화의 시발점이 됐던 것 같다. 파리의 맛집 같은 것들을 하나도 모르고 갔던 터라, 근처에 보이는 식당에 무작정 들어갔다.
크레이프라는 음식을 먹어본 기억이 없었기에 초코 크레이프를 시켰고, 평소 가성비 최악의 음식이라 여겼던 마카롱도 두 개 주문했다. 기분 탓인지 진짜 본고장의 맛이라 그런지 몰라도 엄청나게 맛있게 식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달달한 게 이렇게나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구나를 이때 처음 느낀 것 같다. 아마 이 날 이후로 마카롱을 사랑하게 됐던 것 같다.
든든해진 배를 이끌고 파리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때는 이른 오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흘러가는 센강을 중심으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마치 한강을 중심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을 보는 기분이었다.
바쁜 시내를 유유자적하게 걷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황홀한 일이다. 별 이유 없이 연차를 내고 도시를 걸으며 직장인들을 보는 기분이랄까? 여유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라, 바쁜 일상을 살아갈 때 그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는 법이다. 그 비교 대상의 나의 시간이 아니라, 남들과의 시간일 때 역시 유효하다. 분주한 사람들 틈에서 나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는 그 특유의 만족감이 있다.
도시를 걷다가 한 다리의 철제 그물망에 무수히 많이 달린 자물쇠들을 발견했다. 역시나 사람 사는 거 다를 것 없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는 광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하고 그 자물쇠를 걸고 싶었으나, 아직까지는 혼자 여행하면서 이런 걸 할 정도의 배짱은 없었던 것 같다. 먼 훗날,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그때는 기필코 저기에 자물쇠 하나를 걸겠다는 굳은 다짐과 함께 다리를 떠났다.
갑자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안 오는 것도 아닌, 정원 분무기를 가장 약한 강도로 틀어놓고 그 사이를 거니는 느낌이었다. 우산을 사야 하나 싶었지만, 신기하게 주변 사람들은 이게 일상이라는 듯 그저 거리를 거닐었다. 이게 진정한 파리지앵들의 모습 인가 하는 감탄과 함께 나도 자연스럽게 그대로 걸었다. 최대한 현지인들과 비슷하게 다니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몇십 분을 걸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비는 그쳐있었다. 이곳에서는 이런 날씨가 일상 다반사라고 한다. 만약 나도 파리에서 오래 거주했다면, 가끔 내리는 비에 아무렇지 않게 다닐 수 있었을까?
어찌어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벌써 저녁이 다가왔다. 오늘 저녁에는 에펠 탑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현재 내가 있는 곳에서 에펠탑을 가는 방법을 알아봤다. 숙소에서 만난 사람 말로는 샤요 궁에서 보는 에펠탑이 아름답다고 했었다. 서울에서 매일 같이 지하철을 타던 경험을 살려, 지금 있는 곳에서 제일 가까운 지하철 역에서 샤요 궁이 있는 트로카데로 광장으로 가는 노선을 찾아봤다. 생각보다 쉽게 지하철을 탈 수 있었고, 이런 별 것도 아닌 걸로 혼자 뿌듯해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올라온 뒤부터는 길을 찾는 게 쉬웠다. 그냥 사람들이 많이 걸어가는 곳을 따라가니, 저 멀리 거대한 철탑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여태까지 유럽을 여행하며 온갖 유명한 장소들을 봐왔다. 말로만 듣던 곳들을 직접 볼 때의 그 가슴 벅참이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에펠탑은 그 어떤 장소보다도 남다른 감상이었다.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 산토리니의 이아 마을, 베를린 장벽, 인터라켄의 융프라우, 모두 유명한 곳들이지만, 파리의 에펠탑만큼이나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고 유명한 곳이 있을까. 누구나 아는 국민 배우, 아니 할리우드 배우를 눈앞에서 목도한 기분이 이와 비슷할까? 여행 중에 이렇게 흥분했던 적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원래 '알고' 있던 곳을 방문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놀이동산에 놀러 온 어린아이처럼, 서둘러 광장을 가로질러 에펠 탑이 한눈에 들어오는 공원에 들어섰다. 때는 저녁이라 탑에 불빛이 들어온 상태였고, 그랬기에 탑이 어두운 하늘과 대비를 이뤄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낭만이라는 것을 한가득 채워 넣은 듯한 광경이었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어깨에 기댄 연인들,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은 가족들, 삼각대를 세우고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는 여행객들, 그 모든 사람들과 낭만스러운 순간을 함께 공유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갔을까.
사실 에펠탑 하나만을 두고 봤을 때, 다른 여행지들의 명소보다 압도적으로 아름답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그 특유의 낭만적인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여행가들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건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물과 공간이 적절히 어우러져 자아내는 바로 그 순간의 분위기. 그 순간의 감동은 절대로 잊히지 않고 평생을 가슴속에 자리 잡는다. 그 감동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기에 꾸준히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
에펠탑은 그 분위기의 농익음이 극에 달한 곳이었다. 단 몇 년이 아니라 수 십 년의 세월이 흐르며 형성된 그 특유의 낭만적인 분위기는, 세상의 다른 곳에 에펠탑과 똑같은 탑과 주변 사물들을 배치한다 해도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탑을 만든 사람의 고민, 그 후에 이곳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사람들의 고민, 그리고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남기고 간 아쉬움들이 모여 이 시간을 만든 것이다. 나는 그 낭만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홀로 우뚝 서 있는 탑을 바라보니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졌다. 나는 낭만이 찾아오면 슬픔에 젖어드는 사람인 것 같다. 이스탄불과 산토리니에서 그랬듯.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건지, 근처 벤치에 앉아서 메모장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수많은 문학가를 배출해낸 도시에 와서 그랬나? 나도 모르게 감수성이 흘러나오며 한 시간 가까이 시를 썼다. 지금은 기억이 안 나지만 사랑에 관한 시를 썼던 것 같다. 어쩐지 이곳에 있자면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시가 완성되고 난 뒤, 눈을 들어 바라본 에펠탑은 하얀 불빛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기분 좋은 우연의 일치 덕분에 이곳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고작 첫날 하루였지만, 파리에서의 시간이 모조리 보답받는 느낌이었다. 내일 있을 투어 역시 매우 기대됐다. 내 여행에만 이렇게 축복이 내리는 건지, 모든 여행이 그런 건지는 아직 여행 초행길이라 모른다. 전자에도 무한한 감사를, 후자라면 앞으로 다닐 모든 여행을 기대하게 만드는 감사를 드리는 시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장소에서 한도 끝도 없이 에펠탑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미련 가득한 발걸음을 이끌고 샤요 궁을 지나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향했다. 떠날 줄 아는 용기 역시 여행에서 필요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