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독
여전히 손끝이 시린 어느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씩씩하기만 할 것 같은 여동생이 흡사 목도리도마뱀처럼 부푼 목덜미 한쪽을 보여줬다.
갑상선 문제는 회사동료 대부분 수술을 받아 누군가 아프다고 해도 감정의 변화가 없던 질병이었다.
얄밉기만 하던 혈육이지만 식탁 조명아래 그늘진 목덜미가 보이는데 뜨거운 것이 왈칵 올라오는 것 같았다.
"어머, " 외마디 비명 같은 소리를 내고 조심조심 더듬대는데 보기보다 더 불룩한 그것이 만져졌다.
본가에서 그녀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봄을 목전에 뒀지만 여전히 찼다.
그녀는 급한 성격의 소유자라 1주일도 채 안돼 정밀검사 결과가 나왔다. 좋은 소식하나는 암이 아니라 물혹이라는 점이었다.
곧이어 수술 날짜가 잡혔다. 30대 끝자락까지 남부럽지 않은 골든미스의 삶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작년 운 좋게 아파트를 분양받게 됐다. 이 시점에선 묵직한 한편으론 짐스러운 당첨이지만 원하는 것은 거의 손에 넣고 살던 그녀가 변하는 계기가 됐다. 먼저 지출을 줄일 일환으로 신용 카드 없애는 적용을 시작했다.
이내 아쉬운 소리 잘 못하는 뻣뻣한 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연로하신 부모님께 카드 빌리기는 면이 안 서고 약 3백 정도 한도가 되는 카드를 빌려달라고 했다.
아픈 동생에게 해줄 것이 그것뿐이라 걱정 말고 잘 회복하라며 빌려줬다. 수중에 늘 몇만 원 남짓의 빠듯한 살림이라 꼭 보험금 타면 바로 돌려달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했다. 곧 육아휴직이 끝나고 퇴직을 고려하던 시점이라 더 강조했다. 수술을 목전에 둔 아이에게 겨우 카드 한 장 쥐어주면서 이렇게나 질척거렸다.
십년지기 친구의 큰언니는 전업주부면서도 동생에게 목돈이 필요하면 백만 원씩 턱턱 잘 보낸다던데
그런 배포도 상황도 여의치 않아 씁쓸했다.
사실 갑상선 암은 흔한 질병이고 주변에 실손혜택을 받았다는 얘길 종종 듣고 있어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생의 실손은 최근에 가입한 보험금이라 3백여만 원이 훌쩍 넘는 물혹제거 입원 수술비는 지원되지 않았다.
힘든 일은 어깨동무하고 몰려온다더니 하필 그 진단과 맞물려 그녀가 근무하는 회사 대표의 비위 문제가 시발점이 돼 자진 휴업에 들어갔다. 돈이 더 필요한 시점에 급여의 70%만 받게 되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 거다. 돈을 빌려줄 때 거듭 사정이 좋지 않다고 말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녀의 상황은 더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병원비는 혹시 몰라 6개월 할부로 긁었다고 했는데 그제야 카드 앱을 열어 이자를 확인하니 17% 라는 쾌 큰 이자율이 찍혀 있었다. 속이 따가웠다.
그런 상황 속에 불행 중 다행으로 애물단지로 끼고 있던 자가용을 팔게 돼 그나마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일단, 일시불로 돌려 카드비용을 한 번에 내고 걱정만 하고 있을 동생에게 '비싼 이자는 탕감됐어'라고 무심하게 톡을 보냈다.
야속한 시간은 물 흐르듯 흘러 어느덧 6개월이 흘렀다.
집에서 남편이 운영하는 영어 공부방은 올해 5월을 기점으로 1주년이 됐다. 마지막 수업은 대부분 평일 8시 혹은 8시 반을 훌쩍 넘겨 끝이 났다.
우리는 휴가도 반납한 채 1년을 보냈다. 매일밤 겨우 아이들 씻기고 자정 무렵 곯아떨어졌다.
아직 어린 두 아들은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늘 밖에서 저녁을 때우거나 아파트 도서관에서 숙제를 하는 피곤한 나날들을 보냈다.
1년 새 아이들은 키가 10센티 넘게 자라 있었다. 내년이면 초등 중학년이 되는 큰아들이 가장 걱정스러웠다.
아직 대출 이자가 비싼 차가운 현실이지만 가슴에 꿈을 품고 집 앞 5분 거리에 교습소를 내기로 결단했다.
우리 집 위층은 동네 아이들이 많이 들락거리고 대기가 엄청나 소문난 수학 공부방이다.
계약금을 내고 나머지 보증금을 다 치르기 며칠 전날 큰아이가 나직이 묻는다.
"밖에 다 내는 결정이 맞을까?"
아이는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수학선생님인 3층 이웃을 만나 재원생이 몇 명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엄마 수학공부방은 52명이래 우리는 아직 30명인데 그 아줌마는 아직 밖에다 낼 시기가 아니라 하더라."
교습소를 내며 걱정스러웠던 마음이 어린아이에게도 선명히 전달됐나 보다.
그렇게 몇 주 앞으로 개업 시점이 다가왔다.
우리 부부는 몸으로 때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최대한으로 해내기로 결심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교습소에 들러 틈나는 대로 데코타일을 한 장 한 장 붙였다.
가뭄의 단비처럼 남편을 통해 홀로 되신 시어머니께서 꽤 묵직한 목돈을 보내 주셨다.
오래된 십자 등이 달려있던 애물단지 천장은 전기기사 자격증이 있는 친정아버지께서 한걸음에 달려와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으로 바꿔 달아 주셨다.
어느 날 하얗게 페인트를 칠하고 환기를 위해 창을 열었는데 어디선가 잔잔한 풍경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손길이 닿은 교습소 현관앞 조명에 달린 조개껍질들이 부딪혀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이 동네는 재봉공장이 많은데 교습소를 여는 공간도 원래 재봉사들이 쓰셨다고 했다. 거뭇거뭇하고 칙칙했던 공간이
여러 손길들이 모여 어둠을 밀어냈다.
190만 원이라던 간판도 크게 식당을 운영하는 이웃의 소개로 40만 원이나 아껴 달 수 있었다.
매일 아끼고 아낀 것이 무색하게 계좌에 무슨 구멍이 뚫린 것 마냥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마음이 졸리니 동생에게 꾸어준 돈이 생각났다. 혹시나 확인해 보니 역시나 매달 약속한 원금이 송금되지 못했다.
사정이 빠듯하고 불안이 울컥 올라오는 상황이니 괜히 더 그 아이의 뻔한 사정을 알면서도 서운했다.
동생은 미안하면 오히려 구차한 변명이라던가 설명을 하지 않아 오해를 사는 성향이라 더 속상했다.
사치에 쓴 것도 아니고 몸이 아파 수술비를 낸 것뿐이고 실손 혜택을 못 받을 것이란 예상도 하지 못했으니,
큰언니로서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아쉬운 소리만 하게 되니 얄팍한 지갑사정에 내장만 알싸하게 뒤틀린다.
매일 도장 깨기를 하며 겨우 숨이 할딱할딱 붙어 살아가고 있다.
교습소를 오픈하고 2주년이 됐을 땐 이 결정이 정말 잘한 결정이라고 뒤돌아보기를...
상황이 한결 나아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