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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per Jun 24. 2020

각자의 영역에 대한 인정

지나친 오지랖은 무지함에 대한 반증이다.

바둑이라는 게임이 세상에 나온 뒤로 과연 지금까지 몇 판이나 두어졌을까? 프로기사들의 대국부터 노인정 어르신들의 내기 바둑까지 합친다면 수천만 아니 수억 판 이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바둑판 중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판은 없었을 것이라 감히 짐작해 본다. 왜 그럴까? 사람들이 살아온 인생이 모두 다르기에 저마다의 수 읽기와 결정 속에서 자기만의 바둑을 두기 때문 아닐까?


모든 논쟁은 각자 생각하는 기준의 차이로부터 생겨난다. 저마다의 경험과 지식이 다르기에 아무리 같은 제도권 내에서 동일한 생활을 했더라도 생각의 기준은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서로 다른 생각들을 공유하고 내 생각과의 차이점을 따져 보는 것. 그것이 토론이다. 합의점을 찾아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토의’와 달리 ‘토론’은 열린 결말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더욱더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고,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었으면 어떻게 날 설득할까?’ 하는 상상의 나래도 펼쳐볼 기회가 있다.

다만, 어떤 과학적 지식이나 사건/사고를 언급할 때에는 달라야 한다. 사실은 사실이고, 가정은 가정일 뿐이다. ‘언제 어디서 누가 이렇게 말했다.’, ‘어느 책의 어느 부분에 기술되어 있다’,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다’는 식의 객관성을 포함해야 한다, ‘그냥 들었다’, ‘내가 다 알지’,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식의 추상적인 발언은 신뢰성을 잃는다.

또한, 특정 분야의 전문가이거나 구체적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 등장했을 땐, 그 사람의 발언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그 내용에 논리적 오류가 없다면, 적어도 그 분야에 있어서는 그 사람의 의견이 더 타당함을 인정해야 한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옛말이 나쁜 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전투기 조종사에게 있어 착륙이 얼마나 부드러웠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공중에서 날쌔게 날아 적기를 격추하는 것이 비행을 잘하는 기준이다. 반면, 여객기 조종사는 안전한 이착륙을 최고의 비행 실력으로 여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추구하는 바가 다를 뿐이다.

만일 전투기 조종사가 ‘여객기 조종사들은 비행을 잘 못한다. 공중에서는 무조건 빠르고 급격하게 조종해야 한다. 착륙은 그냥 부수적인 기술일 뿐이다.’라고 말한다거나, 반대로 여객기 조종사가 ‘전투기 조종사들은 비행기를 잘 다룰 줄 모른다. 이착륙을 잘해야 진정한 조종사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영역에 대한 편협한 시각만으로 다른 이의 영역까지 판단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각자의 경험과 지식은 소중하다. 하지만 자신의 영역이 아닌 곳까지 자신이 가진 경험과 지식으로 판단하려 하는 것은 자신의 무지함을 스스로 나타낼 뿐이다.

어쭙잖은 오지랖은 예능일 때 유쾌할 수 있지만, 다큐멘터리가 되는 순간 무지함에 대한 셀프 인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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