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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정길 Sep 02. 2020

운동장과 라인기

조금 더 멀리 바라보기

허리를 반쯤 숙이고 목도 반쯤 앞으로 빼고 무언의 목표를 향해 엉거주춤 걸어간다. 라인기라 불리는 석회가루가 밑으로 뿜어져 나오는 바퀴 달린 기계를 밀면서 말이다. 운동장에 그려진 반듯한 라인을 보며 ‘나도 이제 어엿한 체육교사구나’라는 감회를 느끼곤 한다.     


라인기로 그린 반듯한 운동장의 라인이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실상 그렇지 않다. 외로 반듯하게 그리기 어려운 나름 고난도 작업이다. 아이들이 자기들도 하고 싶다고 해서 라인기를 맡겨두면 운동장에 之(갈지) 자를 그려놓기 십상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운동장에 그려진 라인


교생실습이라 불리는 예비교사 교육에서 라인을 처음 그려봤다. 내가 그린 운동장 안 육상 트랙은 다음날 체육대회에 사용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부족하고 삐뚤어져 있었다. 더운 여름날 땀 뻘뻘 흘리면서 그렸던 소중한 첫 라인은 그렇게 나의 발에 의해 운동장 흙으로 다시 덮여 사라졌다. 희미한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나의 라인 위에는 교생지도 선생님이 다시 그린 반듯한 라인으로 채워졌다. 완성된 육상 트랙은 스타디움의 육상 트랙과 견주어도 부족함 없이 깔끔했다. 그때 본 반듯한 라인도 잊히지 않지만 라인기를 건네주며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라인을 잘 그리는 것도 체육교사의 역량이여! 라인을 잘 그리려면 고개 숙이고 땅을 봐서는 안되거든. 고개를 들어서 멀리 있는 목표지점을 향해 쭉 밀고 나가야 돼. 라인 그리는 거랑 교직 생활하는 거랑 똑같아!"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다만 라인을 잘 그리려면 라인기에서 나오는 석회가루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봐야 된다는 것 딱 그 정도까지만 이해했다. 시간이 지나 체육교사가 되고 수업 준비하랴, 체육대회 준비하랴, 라인을 그리는 횟수가 늘어나니 그제야 스스로 고개를 들어 멀리 있는 목표지점을 향해 라인기를 밀고 있었다.     


예전에는 라인을 그리다 뒤를 돌아보면 지나온 길이 굽이굽이 굴곡져 있었는데, 그리는 도중에는 반듯하게 앞으로 가는 줄만 알았다. 멀리 보지 않은 탓이다. 내 발아래 가까이에 있는 작은 것들에 세세히 신경을 쓴 탓에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굽이져 있었다.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라인을 그리는 것도 몸을 쓰는 일이라 몇 번 하다 보니 자연스레 경험을 통해 체득되었다. 운동장 라인을 그리려면 멀리 보아야 한다. 그래야 비뚤어지지 않고 반듯하게 그릴 수 있다. 교직 생활도 어찌 보면 비슷하다. 아직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작은 것에 연연하고 주변에 있는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에 휘둘리면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길이 굽이진다. 조금은 멀찍이서 교육적 목표를 향해 의연하게 걸어가다 보면 나름 반듯한 라인이 그려져 있지 않을까? 다만 기계가 그려놓은 라인이 아니기에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살짝 비뚤어져 있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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