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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정길 Dec 03. 2020

제주도 어디에 살았어?

같이 알고 있다는 편안함, 너와 나의 공감

내 고향은 바다 건너 제주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를 떠나온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많은 시간 동안 제주가 아닌 곳에서 나를 만난 사람들은 내 고향이 제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대개는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은 거의  똑같았다.  

  

“제주도 어디에 살았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제주는 사계절 내내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내게 질문한 사람들도 제주에 온 관광객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제주에 여행하러 왔을 테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분명 여러 지명도 들어 봤을 것이다. 그 경험이 나에게 살던 동네를 물어보는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제주를 떠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내가 살던 동네 지명과 주변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했다. 그러나 나의 동네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고,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똑같은 질문에 답을 하는 일이 잦아졌고, 유명하지 않은 내 동네를 설명하는 일이 무미건조하게 반복되었다.      


그러다 곰곰이 생각했다. 앞으로도 똑같은 경우가 반복될 것 같은데 무미건조한 설명은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상대방과 공감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제주시 동쪽 끝 ‘화북’에서 살았다. 어릴 땐 탑동 근처 무근성이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뀔 때 이사를 했다. 아직도 부모님이 살고 계시고, 나의 많은 추억이 오롯이 새겨져 있는 곳이다. ‘화북’은 제주에서 드문 벼를 재배하는 북쪽에 있는 마을을 뜻하는데, 요즘은 벼가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와 학교가 많이 들어서고 사람이 모이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관광객이 지나가며 구경할 볼거리가 없는 전형적인 주거지역이다. 제주 사람은 알 테지만 관광객은 모르는, 아니 알 수 없는 그런 동네다.     


이런 동네를 아무리 풀어 설명하려고 해 봐도 상대방의 공감을 끌어내기는 힘들었다. 반응이 다 그저 그랬다. 모르는 것만 주야장천 늘어놓는데 반응이 좋을 리 만무했다.      


‘화북’ 근처에서 가장 유명한 동네는 ‘함덕’이다. 제주시 시내버스 종점인 ‘함덕’은 그래도 제주에 여행 온 관광객이면 한 번쯤은 들러 보는 장소이자, 개인적으로 제주 최고의 해변이라 손꼽는 서우봉 해변이 있는 곳이다. ‘화북’에서는 차로 10분 거리다.     


그래서 요즘은 공감을 위해 제주도 어디에 살았냐는 질문에 ‘함덕’을 아냐고 되묻는다. 그럼 거의 모든 사람은 엄청나게 반기며 ‘함덕’을 안다고 하고, 그곳에서 살았냐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나는 ‘함덕’은 아니고 그 근처라고 말하며 ‘화북’을 향해 점점 이야기를 조여나간다.     


그다음은 ‘화북’의 바로 옆 ‘삼양’을 아냐고 물어본다. 검은모래 해변으로 유명한 ‘삼양’은 제주를 오래 여행하는 관광객이면 한 번은 들리는 곳이다. 엄청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알고 있는 사람은 꽤 있다. ‘화북’ 바로 옆 동네이자, 버스 운행노선에는 ‘화북·삼양’으로 같이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화북’보다는 인지도가 높아 ‘삼양’을 아냐고 물어보면 4할 정도는 안다고 대답한다. 공감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제는 말할 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삼양’ 바로 옆에 ‘화북’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아~ 그랬구나’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아~ 그랬구나’라는 표현 속에는 ‘화북’을 몰랐다는 의미도 같이 담겨 있다.     


똑같이 몰랐는데 기분은 다르다. 예전에 ‘화북’만을 말할 때는 혼자 이야기한 느낌이라면, ‘함덕’과 ‘삼양’을 거쳐 ‘화북’을 말할 때는 같이 소통한 느낌이다. 반응도 다르다. 요즘은 상대방이 알게 되어 좋았다는 반응이다. 예전에는 무심코 그런 곳이 있었냐는 반응이었다.     


같이 알고 있다는 것은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공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방이 알고 있는 것을 내가 알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화북’은 모르지만 ‘함덕’은 알고 있듯이, 그 사람이 알만한 것을 찾아내는 노력이 공감을 만들어 낸다.      


나는 제주에서 살던 동네를 이야기하며 공감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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