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저울처럼 평등하게! 100년 전 백정들의 외침-형평운동

법 앞의 평등을 넘어 진정한 사회적 평등을 향한 여정

(본 글은 인문학 전문학술 논문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원문 전부는 KCI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I. 머리말: 법과 현실의 간극

- 갑오개혁 이후, 사라지지 않은 차별의 그림자


조선은 만물의 이치와 기운을 따져 위계를 설정하는 성리학적 이기론(理氣論)에 기반하여, [경국대전]이라는 법전을 통해 양반부터 천민까지 이어지는 상하귀천의 신분 구조를 법제화했습니다. 이는 사회 운영의 근간을 이루는 차별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와 천주교 전래, 동학농민혁명 등을 거치며 "신분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에 대한 열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전종익, 2009; 2021 논문 참조).


마침내 1894년 갑오개혁 때 "문벌과 반상 등급을 혁파"하고 "공사노비를 혁파"하며, 특히 "역인(驛人), 창우(倡優), 피공(皮工)의 면천(免賤)을 허락하는 건" 등이 법으로 통과되면서 공식적인 신분 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송병기 등 편, 『한말근대법령자료집』 1 참조). 법적으로는 양인과 천인의 구분이 없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법의 선언이 곧 현실의 변화는 아니었습니다. 국가 차원의 실질적인 후속 조치는 미흡했고,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차별 의식은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법 개정 이후에도 노비는 여전히 부림을 당했고 (『한말근대법령자료집』 1, p. 281 참조), 최하층 천민으로 인식되던 백정들은 의복 착용 등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모욕과 제약을 겪었으며, 심지어 지방 관료들조차 이러한 차별을 용인했습니다. 이처럼 법적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사회적 차별', '관습상의 차별', '실질적인 차별'은 일제강점기까지 끈질기게 이어졌습니다. 바로 이 [법제와 사회 현실의 깊은 괴리] 속에서, 가장 천대받던 백정들이 스스로 인간다운 권리를 찾기 위해 떨쳐 일어선 운동이 바로 1923년부터 1935년까지 약 12년간 이어진 [형평운동(衡平運動)]입니다. 본 논문은 이 형평운동을 백정들의 평등 요구, 이에 대한 사회 내부의 갈등(반형평운동), 그리고 식민지 공권력의 역할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분석합니다.


II. 백정, 차별의 역사와 형평운동의 씨앗

- 조선 시대 천민에서 근대적 평등을 외치기까지


본래 '백정(白丁)'은 고려 시대에는 특정 직역 없이 자유로운 농민층을 의미했으나, 조선 건국 후 고려의 천민 집단이었던 재인(才人)·화척(禾尺) 등을 '백정'으로 개칭하면서 경멸과 천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국가는 이들을 일반 농민 사회에 통합시키려 했지만, 주로 사냥이나 유랑 생활을 하고 가축 도살(소위 '칼잡이', '도한'), 가죽 제품 생산('갖바치', '피장'), 고리 세공('고리백정') 등 특정 직업에 종사하며 일반 농경민과 구별되는 생활 방식을 유지했기에 사회적으로 쉽게 동화되지 못하고 배제되었습니다. (김중섭, 2013; 2014 논문 참조). 북방 유목민의 후예라는 설(양수척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기도 했으며, 도망 노비나 몰락 농민 등이 합류하면서 점차 '천한 일을 하는 집단'이라는 고정관념이 굳어졌습니다.


그 결과, 백정들은 법적으로 호적에 오르지 못하고 거주지를 제한받는 것은 물론, 집과 옷차림, 음식 등 의식주 생활, 결혼과 장례 같은 관혼상제, 자녀 교육 기회, 다른 집단과의 교류, 심지어는 사용할 수 있는 이름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광범위하고 뿌리 깊은 차별에 시달렸습니다.


갑오개혁 이후에도 차별의 근거는 교묘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1896년 '호구조사규칙'으로 백정도 호적(戶籍)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지만, 시행세칙의 호적 양식에는 직업을 반드시 기재하도록 했고, 백정의 경우 그 직업란에 ['도한(屠漢)', 즉 '짐승 잡는 자']이라고 명시하게 하여 과거의 천민 신분을 공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이는 1909년 '민적법'에서도 유지되어 사회적 낙인을 지속시키는 제도적 장치가 되었습니다. (『한말근대법령자료집』 II, VII 참조). 한편, 국가가 도축업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일반인들도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되어 백정들은 전통적인 생업 기반마저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제한적이나마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었습니다. 이 시기 신문과 잡지를 통해 자유, 평등, 인권 등 서구의 근대 사상이 활발히 소개되었고, 낡은 관습을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자는 '신문화건설론'이 힘을 얻었습니다. 전국적으로 농민·노동·청년·여성 등 다양한 사회운동 단체가 결성되는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1923년 마침내 진주에서 [형평운동]의 첫걸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III. "공평은 사회의 근본": 형평사의 창립과 이념

- 계급 타파와 인간 존엄 회복을 위한 외침


1923년 4월 25일, 경남 진주에서 백정 80여 명이 모여 역사적인 [형평사(衡平社)] 발기총회를 개최했습니다. '형평(衡平)'이란 저울처럼 공평함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형평사의 나아갈 길을 밝힌 주지(主旨)와 규칙을 정하고 임원을 선출하며 운동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그들의 간절한 염원과 목표는 창립 주지문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 본래의 착한 마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된 사람이 되기를 기약함이 본사의 주된 뜻이다. ... 과거를 돌아보면 종일 통곡하며 피눈물을 금하기 어렵다. ... 눈앞의 압박 철폐를 절규하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요,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함이 우리의 급선무임을 정확히 인정한다. ... 우리도 조선 민족 2천만(당시 인구 추정치)의 한 사람이다. 사랑으로써 서로 돕고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며 공동의 생존 방책을 기약하고자 ... 사천여 명(당시 백정 인구 추정치)이 단결하여 본사의 목적인 주지를 천명하며 내세우고자 한다." (《조선일보》 1923. 4. 30. "형평사주지")


형평운동 지도자 중 한 명인 장지필은 당시 사회를 향해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갑오경장 때 7가지 천한 역(七般賤役)을 없애고 호적에 올리라는 조서가 내렸습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해방은 실현되지 못하고 민적(호적)에까지 '도한(屠漢)' 같은 글자를 써넣어 자식을 학교에 보낼 수도 없고 영원히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할 지경입니다. ... 우리의 목적은 오직 해방되어 평등한 대우를 받게 되면 그만입니다. 그 이상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동아일보》 1923. 5. 20. "사람대우를 애걸")


이처럼 형평운동은 "우리도 사람이다!"라는 인간 존엄성의 선언이자, 사회적으로 "사람 대우", 즉 "민적에서 백정이라는 글자를 없애고, 학교에서 양반 자제와 똑같이 공부할 수 있게 하며, 일상 교제에서 인간으로서 당연한 예우를 받는 것"을 요구하는 사회 평등 운동이었습니다. (『개벽』 36, 1923, p. 59 참조). 그 사상적 기반은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가진다"는 [천부인권론][만민평등사상]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체제 저항 운동이 아니라, 사회 깊숙이 박힌 "전통과 습관을 타파하고 민간의 차별을 철폐하며" 궁극적으로 "백정이라는 이름 자체를 없애려는" [사회적 신분 해방 운동]이었습니다. (《조선일보》 1924. 8. 21; 《동아일보》 1923. 5. 26. 참조). 주목할 점은 형평사 사칙에 "조선인은 누구든 입사할 수 있다"(제4조)고 명시하여, 백정 출신뿐 아니라 강상호(언론인), 신현수(언론인), 천석구(언론인) 등 비백정 출신 사회운동가들도 지도부로 참여하며 폭넓은 연대를 지향했다는 것입니다.


IV. 확산과 연대, 그리고 내부의 목소리

- 전국으로 퍼져나간 평등의 불씨와 운동 노선 갈등 분석


형평사의 출범은 당시 언론과 지식인 사회, 그리고 여러 사회운동 단체로부터 뜨거운 지지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형평운동을 낡은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 근대적 인권 사회로 나아가는 중요한 발걸음으로 평가하며, 백정 차별에 대한 사회 전체의 각성을 촉구하고 운동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이러한 호응에 힘입어 형평운동은 들불처럼 번져나가 1935년까지 전국 각지에 약 200개에 달하는 지사와 분사를 설립하며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지·분사 설립은 주로 뜻있는 백정들의 자발적인 조직으로 이루어졌지만, 지역 사회운동가나 언론인들의 지원과 역할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운동의 규모가 커지고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운동의 [방향과 노선을 둘러싼 내부적인 고민과 논쟁]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i) 민족 운동과의 연대 강화론: 일부에서는 형평운동이 단순히 백정 계급의 해방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일제 치하의 모든 조선인이 겪는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전체 민족 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계급의 장벽을 타파하는 데 만족하지 말고 전체 민족을 한 용광로에 녹여 대동단결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조선일보》 1923. 5. 21) 고 외치며, 다른 사회 운동과의 적극적인 연대를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형평사 운동이 "민족적 운동과 조화를 잃지 않아야 한다" (《동아일보》 1923. 5. 29) 고 보았습니다.


(ii) 사회주의 계급 투쟁론: 당시 확산되던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형평운동의 인권·평등 주장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백정 역시 노동자·농민과 마찬가지로 착취받는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임을 강조하며, 진정한 해방은 계급 투쟁을 통해 "착취자와 박해자를 매장시키는 신사회"를 건설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선일보》 1923. 6. 24). 따라서 형평운동은 "선명한 계급적 의식"을 가지고 다른 무산계급 운동과 연대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김덕한, 『개벽』 50, 1924, p. 42).


(iii) 백정 해방 중심론: 반면, 일부에서는 운동의 초점이 흐려지는 것을 경계하며 우선 백정 계급의 실질적인 차별 철폐와 권익 향상에 집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이들은 다른 운동과의 연대에 상대적으로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노선 갈등은 목표 자체의 차이라기보다는, 동일한 목표를 어떤 주체와 방식으로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 갈등은 때로 내부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특히 사회주의 노선을 따른 일부 활동가들은 이후 총독부의 거센 탄압 대상이 되었습니다.


V. 또 다른 벽, 반(反)형평운동의 등장

- 평등을 향한 길목에서 마주한 격렬한 저항과 갈등 양상


형평운동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외치며 사회 변화를 요구하자, 예상치 못한 거센 반발이 터져 나왔습니다. 놀랍게도 이 저항은 전통적인 양반 지주층뿐 아니라, 오히려 같은 피지배층이었던 농민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더욱 격렬하게 나타났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낮은 곳에 있던 백정들이 동등한 지위를 주장하는 것을 자신들의 상대적 지위 하락으로 받아들이거나, 뿌리 깊은 봉건적 차별 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형평운동을 억누르려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반(反)형평운동]입니다.


1923년부터 1935년까지 형평사원과 주변 주민들 간의 충돌은 전국적으로 수백 건에 달했으며, 단순한 말다툼을 넘어 집단 폭행과 기물 파손 등 심각한 물리적 충돌로 비화되곤 했습니다.


김해 사건 (1923년 8월): 김해의 청년 단체가 형평사 지사 설립을 돕자, 이에 반발한 다수의 농민과 노동자들이 형평사원과 청년회 간부들을 습격했습니다. 경찰의 초기 대응은 미온적이었고, 당시 한 신문 사설은 이를 두고 경찰이 민족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략적 경찰방침"을 쓴 것이 아니냐고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조선일보》 1923. 8. 26).


예천 사건 (1925년 8월): 형평사 기념식에서 한 청년회장이 백정을 모욕하는 발언을 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수백 명의 군중이 형평분사를 습격하고 사원들과 유혈 충돌을 벌였습니다. 사건의 배후에는 형평사원들의 태도에 대한 불만과 함께, 이들을 지지하는 다른 사회 단체에 대한 반감, 그리고 지역 사회 단체 간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경찰은 이번에도 외부 세력과의 연대 차단 등 소극적 중재에 그쳤습니다. (《조선일보》 1923. 8. 16). 조사 결과, 폭력 가담자 대부분이 농업 노동자나 소작농이었다는 점은 반형평운동이 기층 민중의 깊은 차별 의식에 기반했음을 보여줍니다. (최보민, 2016 논문 참조).


이 외에도 현풍, 함열, 임실, 예산, 홍성, 달성 등 전국 각지에서 형평사 지부 설립 축하식, 술자리 시비, 백정에 대한 모욕적 언사 등이 빌미가 되어 농민·노동자들과 형평사원 간의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는 이러한 반형평운동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특히 같은 피지배 처지에 놓인 농민·노동자들이 형평사원들을 천시하는 것에 대해,


"형평사원이나 농민의 사이에 차별이 있으면 몇 푼어치나 있으며 조선놈이라는 슬픔을 서로 받는 원한과 비천한 대우에 무엇이 얼마나 차별이 있겠느냐. 하물며 서로 도와서 해방운동의 기세를 도움고 생명의 새로운 길을 발견하기에 여력이 없는 이때에 거지들 누더기 싸움을 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동아일보》 1925. 8. 16. "농민과 형평 충돌")


라고 개탄하며, 이는 민족 내부의 분열을 초래하는 어리석은 행위이자 극복해야 할 봉건적 유습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형평운동을 가로막은 것은 외부의 억압뿐 아니라, 내부의 뿌리 깊은 편견과 갈등이라는 또 다른 거대한 벽이었습니다.


VI. 학교에서의 차별과 경제적 압박

- 교육 기회 박탈과 생존권 위협에 대한 심층 분석


반형평운동은 물리적 폭력 외에도 백정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교육 차별과 경제적 봉쇄]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그들의 숨통을 조였습니다.


교육 현장에서의 배제 (동명학교 사건 등): 미래 세대를 통한 신분 해방의 꿈은 교육 현장의 높은 벽 앞에서 좌절되곤 했습니다. 1924년 천안 입장면의 사립 동명학교에서는 백정 자제들이 입학하자 일반 학생들이 "백정 아이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할 수 없다"며 집단으로 등교를 거부하고 이들의 퇴학을 요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교사들까지 이에 동조하여 집단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동아일보》 1924. 7. 21, 7. 23 참조). 학교 측은 임시방편으로 백정 학생들을 분리 수용했지만, 형평지사가 항의하자 지역 부인들은 "백정이 파는 고기를 사지 않고, 백정과는 말도 섞지 않겠다"며 '부인동맹'을 결성해 압박의 강도를 높였습니다. (《조선일보》 1924. 7. 24 참조). 이처럼 학교 입학 자체를 거부당하거나, 입학하더라도 동급생과 교사로부터 "백정 자식"이라며 차별과 따돌림, 폭행을 당하는 일은 전국적으로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는 백정들에게 교육을 통한 사회 상승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하는 잔인한 차별이었습니다.


경제적 생존권 위협 (수육 비매 동맹 등): 반형평운동 세력은 백정들의 주된 생업인 도축 및 육류 판매를 겨냥하여 경제적 압박을 가했습니다. 형평사 출범 직후부터 진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농민 단체 등을 중심으로 "형평사와 관계있는 자는 백정과 똑같이 대우하고, 그들이 파는 소고기(牛肉)는 절대로 사지 말자(非賣同盟)" (《동아일보》 1923. 5. 30) 는 결의가 잇따랐습니다. 이는 형평사원들의 생계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치명적인 수단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구매를 거부하는 것을 넘어, 일반 농민이나 상인들이 자체적으로 '수육판매조합'을 결성하여 형평사원들의 전통적인 독점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아일보》 1923. 8. 23; 《조선일보》 1924. 6. 6 등 참조). 이러한 움직임 뒤에는 뿌리 깊은 차별 의식과 더불어 "백정들이 고기 값을 비싸게 받아 폭리를 취한다" (《조선일보》 1925. 6. 4; 《동아일보》 1926. 5. 9 등 참조) 는 경제적 불만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생존의 위협을 느낀 형평사원들은 이를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는 수단이며 인권을 무시하는 것이며 자유를 유린하는 것" (안병희, 1929) 이라고 규정하며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이러한 절박함은 1928년 형평사 전국대회에서 강령 제1조로 "우리들은 경제적 요건을 필요로 하는 인권 해방을 근본 사명으로 한다" (《동아일보》 1929. 1. 4) 고 선언하게 된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반형평운동은 교육과 경제라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영역까지 파고들어 백정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VII. 식민지 공권력의 양면성: 소극적 개입과 차별 시정 요구

- 일제 당국의 방관과 개입 사이, 차별 철폐 요구에 대한 대응 분석


격화되는 형평운동과 반형평운동의 갈등 속에서, 당시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와 그 산하 경찰 등 공권력]은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요? 본 논문은 이들의 대응이 상당히 이중적이고 소극적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갈등 방관과 소극적 개입: 김해, 예천 등지에서 발생한 대규모 충돌 사건에서 보듯, 경찰은 형평사원과 반대 세력 간의 갈등이 심각한 폭력 사태나 사회 불안으로 확대되지 않는 한, 직접적인 개입을 최소화하고 사태를 방관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는 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과장이 밝힌 "형평운동을 시인하는 바요, 결코 압박을 하거나 금지를 하거나 하지 않음" (田中武雄, 1925) 이라는 공식 입장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즉, 운동 자체를 불법으로 탄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보호하거나 차별 문제 해결에 나서지도 않는 애매한 태도였습니다. 당시 비판자들은 이를 두고 "서로 싸우게 내버려 두는(以夷制夷)" 식민 통치 술책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함열 사건처럼 일부 경찰관이 직접 폭력에 가담하거나 군중을 부추겼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로 공권력의 역할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조선일보》 1926. 2. 14).


공무원의 차별 행위에 대한 시정: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경찰관이나 집달리 등 공무원 자신이 직무 수행 중 백정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거나 차별적인 행정 처리를 한 경우에 대해서는, 형평사 측이 강력하게 항의하면 비교적 신속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민적부 등 공문서에 '도한(屠漢)'과 같은 차별적 용어를 삭제해달라는 요구에 대해 "민적상 차별을 철폐" (《조선일보》 1923. 5. 14) 하겠다고 약속하거나, 차별 행위를 한 관리에 대한 조사 및 재발 방지책 마련을 약속하는 등 [공권력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개선 의지]를 보인 사례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차별' 철폐 요구에 대한 외면: 그러나 당시 백정들이 겪던 차별의 본질은 공무원의 개별적 일탈 행위가 아닌, 사회 전반에 만연한 [관습적·구조적 차별]이었습니다. 형평사 중앙총본부는 1926년, 총독부에 단순히 공무원 교육 강화를 넘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차별 행위들, 예컨대 "인습적 편견에 기하여 ... 고의로 언어상 차별, 차별적 대우를 하는 자", "탕옥(목욕탕), 이발옥, 요리점, 여관 기타 공중이 출입하는 장소에서 모욕적 칭호를 ... 행한 자", "인습적 편견에 의하여 ... 업무를 방해하여 생활에 위협을 ... 하는 자" 등을 법령으로 명확히 규정하여 금지하고 처벌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조선일보》 1926. 3. 29. "규정제정을 총독부에 요구"). 총독부 측은 이에 대해 "모두 시행하겠다"고 원론적으로 답변했지만, 실제적인 법 제정이나 적극적인 단속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총독부 공권력은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차별의 구조를 바꾸려는 적극적인 노력보다는, 현상 유지와 소요 방지라는 소극적인 관리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이는 형평운동이 근본적인 한계를 넘어서기 어려웠던 중요한 외부 요인이었습니다.


VIII. 미완의 혁명, 남겨진 평등의 과제

- 형평운동의 종결과 1948년 헌법 '사회적 신분' 조항의 의미 탐구


약 12년간 끈질기게 이어졌던 형평운동은 안타깝게도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완전히 뿌리 뽑지 못한 채 막을 내렸습니다. 운동의 추진 동력은 내부 노선 갈등으로 약화되었고, 결정적으로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가 전시체제로 돌입하며 모든 사회 운동을 강력히 통제하면서 활동 공간이 극도로 위축되었습니다. 결국 형평사는 일제의 압력과 회유 속에서 조직 생존을 위해 본래의 저항 정신을 잃고 친일 부역 단체인 '대동사(大同社)'로 흡수·재편되면서, 인권 해방과 사회 평등 운동으로서의 역사는 사실상 종결되었습니다. (고숙화, 2008 참조).


그러나 운동의 종결이 차별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형평운동이 남긴 숙제, 즉 백정에 대한 [사회적·관습적 차별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점까지도 엄연히 존재]했습니다. 1947년 6월 25일자 《독립신보》 기사는 당시 전국식육상조합중앙연합회(백정들이 주축이 된 단체)를 "오늘에도 봉건유제의 잔재에 그대로 억눌리고 있는 소위 백정이라고 천대받은 오십만 인민의 집결체"라고 표현하며,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여전했던 차별의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본 논문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제헌헌법 제8조]에 담긴 '평등'의 의미를 주목합니다. 이 조항은 "모든 국민은 법률앞에 평등이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사회적 신분']이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본 논문은 이 '사회적 신분'이 단순히 법적으로 폐지된 과거의 신분 제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합니다. 법적 신분제는 이미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고, 제헌헌법 제8조 제2문에서도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일체 인정되지 아니하며 여하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하지 못한다"고 명확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법 기초위원이었던 유진오 박사 역시 당시 기록에서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법률상의 차별을 받지 아니하는 원칙은 거의 확립되어 있다" (유진오, 1949)고 하면서도, 여전히 사회적으로 '신분'으로 여겨지는 차별이 존재함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제헌헌법 제8조의 ['사회적 신분'에 의한 차별 금지] 조항이, 형평운동이 그토록 철폐하고자 했던 법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관습적·문화적·경제적 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인식하고, 이를 헌법적 차원에서 금지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분석합니다. 더 나아가, 이는 단순히 국가가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 의무를 넘어, 사회에 실재하는 구조적 차별을 시정하고 실질적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책무까지 함축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형평운동의 쓰라린 경험은, 진정한 평등이란 법 조항의 완성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사회 구성원의 인식 개선과 함께 국가의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개입과 노력을 통해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미완의 과제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제헌헌법의 이 정신은 약간의 수정과 함께 현행 헌법 제11조 제1항으로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형평운동의 역사를 되짚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등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열쇠를 제공합니다.


[독자의 평가와 일독을 권하는 이유]


이 논문은 100년 전,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외쳤던 백정들의 형평운동을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법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평등이 어떻게 좌절되고 또 투쟁을 통해 진전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차별이 단지 법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공권력의 태도와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설득력 있게 분석합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평등’의 가치가 결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며, 소수자의 인권 문제가 과거의 일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과제임을 깨닫게 합니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 상황 속에서 펼쳐진 치열한 인권 투쟁의 기록이자, 오늘날 우리 사회의 차별 문제를 성찰하게 만드는 중요한 연구로서 일독을 강력히 권합니다.


(본 글은 전종익, "형평운동과 평등의 과제", <법사학연구> 제70호, pp. 329-354 (2024), KCI 등재 논문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 원문 전부는 KCI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https://www.kci.go.kr/kciportal/po/search/poArtiTextSear.kci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