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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접시 Aug 21. 2023

대신 전하러 갑니다

 전하고 싶던 이야기

재개발 지역으로 이사와 아파트 주변으로 동네 곳곳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있다. 큰 길가 옆 시장도 정비를 했지만, 어느 시골 읍내를 반듯하게 잘라 옮겨 놓은 것 같다. 큰 길가 시장길을 ‘읍내길’이라고 별명을 지어주었다. 주로 읍내길 상점들은 50대 이후 사람들이 최대 고객이라 취향도 중장년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로 진열되어 있다.


최근 읍내길에 있는 한 옷가게에 마네킹 앞에 어슬렁 거리게 된다. 내 취향이 갑자기 변한 것은 아니다. 옷을 사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여자친구에게 옷을 선물해 주고 싶어졌다. 암만 생각해도 선물해주고 싶은 사람의 취향을 잘 모르겠다. 십 오 년에 걸쳐 열 번쯤 만났을까? 나보다 오래 알고 지낸 남편에게 양양아주머니 옷을 골라 달라고 했다. 남편은 옷 사러 가는 것을 제일 싫어하지만 집 근처 읍내 옷가게 가서 산다고 하니 흔쾌히 따라나섰다. 남편은 신중하게 “아주머니는 화려한 옷 안 좋아하시는 것 같아.” 우선 꽃무늬 옷들과 화려한 패턴으로 디자인되어 있는 옷들은 탈락이다. 매장을 두어 바퀴 돌아보고 네 비이컬러에 품이 넉넉하고 목과 팔둘레에 눈에 띄지 않게 레이스가 둘러진 옷을 골랐다. 얌전한 느낌이라 자주 다니시는 절에 가거나 나들이 갈 때 입어도 좋을 것 같다.

계산을 하면서 “혹시 선물드릴 건데 옷이 마음에 안 들면 교환은 다음 주 이후에나 할 수 있는데 괜찮을까요? 아니면 강원도 양양에 사는 분에게 드릴 건데 그쪽에도 매장이 있나요?”라고 물어보니 지방 소도시에도 거의 다 있다고 했다. 혹시나 없으면 여름이 지나기 전에 입지 말고 갖고 오기만 하면 다 바꿔준다고 하셨다.


결혼한 첫해 여름 시댁에서 양양 아주머니를 처음 만났다. 결혼식 때도 오셨다고 했지만 나는 정신이 없어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아주머니를 보고 당황한걸 눈치챘는지 시아버지는 “우리 친구야. 둘이 빤스만 입고 나란히 자도 아무 일 없어” 요즘 아이들이 말하는 여자 사람 친구라고 소개를 했다. 시아버지는 키도 작고 눈매가 날카롭고 깡 말랐다. 반면 아주머니는 풍채가 있고 동글 넓적한 얼굴에 눈은 작았지만 선했다. 시골 할머니에게서 보기 힘든 빠글 머리 파마를 하지 않고, 짧게 자른 쇼커트 머리가 인상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뭘 해야 할지 앉아야 할지 서야 할지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아줌마는 조용히 할 일을 찾아 하셨다. 그제야 나도 옷을 갈아입고 아주머니를 따라갔다. 주방 가스레인지 뒤 타일에 찌든 때를 닦으며 아줌마는 “이기 언제 닦고 안 닦았는지 누른 게... 에구 쯧쯧 느그 아버지 혼자 용케 잘 산다." 하고 흉을 보았지만, 아주머니 말투에는 전우애 같은 끈끈함이 있었다. 시아버지도 아주머니에게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말하기보다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왜 남의 집에 와서 신경 쓰이게 그걸 닦고 있냐고 뭐라고 하셨다. 둘을 신기하게 바라보다 남편에게 몰래 물었다. "아버님 여자친구 있었어? 대박 와 "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말 하긴 뭣 하지만 시아버지가 남자친구로는 진짜 별로인 것 같았다. 돈이 많아 호강시켜 줄 것 같지도, 운전을 해서 좋은 곳을 데리고 가는 것도 아니고, 얼굴이 잘 생긴 것도, 키가 훤칠한 것도 아님 최소한 말투라도 상냥해야 하는데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다하는 스타일이다.


아무리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해도 아주머니가 어쩌다 우리 시아버지 친구가 되었는지, 게다가 아주 가끔 와서 하루이틀 머물다 가지만 애인사이도 아니라고 하는 것도 신기했다. 아버님과 친구 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언제부터 친구가 되었는지 다 궁금해졌다.


남편은 어린 시절 양양 철광산 사택에 살았다.

아주머니도 한 동네 사람이었는데 사고로 남편을 잃고 아들과 의지하며 살았다고 했다.

다 키운 아들이 장가도 가고 잘 사는가 싶었는데

큰 병에 걸렸다. 그 당시 시아버지는 아들 둘 키우며 살고 있었다. 결혼이라도 해서 지참금을 받아  아들 병을 고쳐주고 싶을 만큼 마음이 급했다. 시 할머니는 평생을 그러모은 땅을 팔아 남의 집 아들 병고 쳐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사 반대해서 결혼을 못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은 죽고, 시아버지는 옆에서 묵묵히 힘든 일을 도와준 것 같다고 남편에게  들었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커다란 슬픔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맞았던 아버지와 아주머니는 친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두 분은 같은 강원도에 살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강원도 서쪽홍천에 아주머니는 강원도 동쪽 양양에 산다. 거리는 가깝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만나려면 쉽지 않다. 하루에 버스가 몇 번 지나지 않는다. 첫차를 타고 간다 해도 갈아타는  버스 배차 간격이 길어 늦은 오후가 돼서야 만날 수 있다.

다 혼자 외로움을 맞대고 사는 것보다 지금이라도 진짜 사귀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넌지시 아주머니께 물었더니 "니 아버지 볼게 뭐 있어. 잔소리도 보통이 아니고

약주도 어지간히 먹어야지. 속 편하게 혼자 사는 게 편해. 안 해"라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시아버지 마음도 궁금해 물었더니

"뚱뚱해서 여기저기 아픈데도 엄청 많아. 송장 치를 일 있냐"며 싫다 하셨다.


시아버지는 추수를 하고 겨울이 오면 남편에게

양양아주머니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

한 포대,  들기름 한병, 흰 봉투를 건넸다. 아주머니 싫다고 안 받는다 하면 시아버지는 화가 잔뜩 난 사람처럼 "내가 맨날 줘? 빙시같이 주는 것도 안 받고 뭐 해"라고 하면 아주머니는

줄 것도 없다며  어정쩡한 자세로 어쩔 줄 몰라하며 "내가 밥 못 먹을까 봐!"라며 받아쳤다.

꼭 싸우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처음 몇 해는 겁을 먹고 둘을 바라보았다. 두 분의 대화에 익숙해지고는 서로 꼭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편하게 자리를 비켜줘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아줌마가 내어주는 소주 한 컵 마시고는 30분도 안 됐는데

"어서 일어나 가자" 하실 때가 많았다.


아버지의  부고를 아주머니에게 전했다.

작은 한숨과 함께 마음도 무너져 내린 게 수화기로도 느껴졌다. 장례가 수원이라고 하자

그 멀리까지는 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다리가 아파 읍내를 잘 못 나가 모레쯤이나 조의금을 보내겠다며 또 미안해했다.

시아버지가 해마다 아들들을 위해 등을 달고 있는 절에도 연락을 해야겠다며 참고 있던 눈물을 삼켰다.

조의금은 안 받겠다고 하니 불편함을 꺼냈다.

여름휴가에  함께 아버지가 등 달아 주던 절에 같이 가 달라고 부탁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꽃도 지고 한동안은 비가 많이 내렸다. 이제는 아침부터 후끈한 기운이 느껴진다. 옷을 사놓고 수줍게 전화드렸다. 다음주가 휴가라 찾아가려고 하는데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으니

없다, 싫다고 수화기 너머로 안 봐도 얼굴이 붉어지는 게 그려진다.  그럼 아무거나  막 사가니 꼭 먹고 싶은 걸 말해야 한다고 하니 수줍게 "참외 몇 알이면 돼."


아버지를 대신해  블라우스 한벌, 참외 한 봉지, 평소 돈 아끼냐고 못 사드시던 것 맘  골라서 사다 드려야겠다.  외로운 시아버지 인생에 좋은 친구로 남아줘서 고맙다 이야기할 거다.

아줌마와 나는 시아버지의 땅에서 나온 음식을 먹고 나누는 사이였다. 우리는 갑자기 버럭하고

뭐라 구박하는 사람이 사라졌다. 좋지만 않고

오히려 따끔거리고 허전할 것이다. 인제는

시장에서 국산 들기름병을 보면 같은 사람이 생각나는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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