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함보다 애매한
이게 이번 생 제 디폴트 값인 가봐요
가끔 서로의 고민을 나누는 동생 같지 않은 그녀와 지금 겪고 있는 힘든 것들, 앞으로의 날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디폴트 값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 기본값은 경제적, 기술적 의미에서 많이 쓰는 말인데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하길래 물어보니 요즘은 일상 대화에서 더 많이 쓰인다며 내 디폴트 값을 물어봤다. 솔직히 그때는 '그런 게 있어?'라는 생각을 했는데, 곱씹을수록 이번생 디폴트 값이라는 말은 나를 절망에 빠지게 만들었다. 대개 그렇듯 나의 한계점을 본 것만 같아서.
어느 분야에서도 늘 어중간했다. 서글픈 것은 애매함보다 애매한 것이 어중간함이라는 것. 부모님 말씀을 곧잘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반항을 했고, 성적은 늘 중간쯤이었다. 기억에 남는 외모도 아니라서 상대방들은 여러 번 만난 뒤에야 내 얼굴을 익히곤 했다. 인생에서 1등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 수많은 도전 중에서도 1등을 쟁취한 적은 없다. 노력부족이라는 생각에 악착같이 했을 때에도 나를 놀리듯 결과는 전과 같았다. 결국엔 재능을 탓하고, 운을 탓하고, 나를 탓했다. 무수한 시절을 그렇게 어중간하게 살아왔지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직업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도 느꼈던 어떤 부분이 디폴트 값이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어중간함임을 깨달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느껴졌다. 나를 명명할 수 있는 단어를 찾은 것만 같아서 조금은 후련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이도 저도 아니라서 되려 내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던 날들. 나를 규정짓지 못해서 그렇게 철학 책을 좋아했나 싶기도 했던 지난날들에 대한 답이 어중간함이라서 조금은 아쉬웠지만, 오히려 어중간했기에 큰 파도가 몰아쳐도 잔잔하게 살아올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안도감도 몰려왔다.
애매함보다 애매한 어중간함이 내 기본값이라 해도 이젠 절망하지 않는다. 생각지도 못하게 밀려오는 것들에 거센 저항을 하거나 순순히 굴복을 하고 싶진 않다. 그저 '나'를 잊지 않고 '나'를 사랑하면 그것이 고난 또는 무력감이 아니라 나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중간한 아름다움, 기쁨, 설렘, 행복으로도 나는 만족하고 충족될 것이니 나는 나의 디폴트 값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