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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슈 Jun 25. 2020

무계획 여행의 매력

제주에서 남기는 브런치 첫 기록

 

2020.6.23 월정리 LOWA



나는 지금 제주다. 정확히는 어제 봐 두었던 월정리에 위치한 내 취향의 카페다.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원목 가구들로 이루어진 카페 내외부와, 여기저기 식물과 드라이플라워, 패브릭 소품 등으로 인테리어가 되어있어 빈티지한 분위기가 난다. 내가 앉아있는 자리는 창문이 없는 창가석(?)이라서 바로 외부와 연결되고,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아닌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들어와서 커튼이 살랑살랑거린다. 마크라메 커튼 사이로 통과하는 햇살이 원목 테이블에 커튼의 패턴 그대로의 그림자를 만들고 있고, 고개를 살짝 들면 민트빛의 제주 바다가 살짝 보이기도 한다. 당근 100% 착즙 주스의 채도 높은 색감도 보기 좋다.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한 카페들처럼 손님이 많지 않고 테이블 간격도 넓으며, 카메라 셔터 소리 대신에 다른 테이블 손님들의 조용한 대화 소리가 들린다.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재즈 덕분에 제주가 아닌 지중해의 어느 휴양지가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든다.


 그동안 여행을 좋아해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다녔지만 혼자 떠나는 여행은 대학생 때 갔던 유럽 배낭여행 이후로 6년 만에 처음이다.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구매할 때도 굳이 같이 갈 사람을 찾지 않고 오로지 내 스케줄에 맞춰서 충동적으로 구매했고, 숙소를 정할 때도 상대방의 의견을 물을 필요 없이 나의 취향대로 정했다. 이번 여행은 비행기 티켓과 숙소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즉흥적인 여행이다. 다른 말로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 숙소가 위치한 월정리에서 발길 닿는 대로, 마음 닿는 대로 다니기로 했다.


 어제는 여행 첫째 날이었는데, 월정리 중심가를 벗어난 곳에 위치한 서점에 가다가 우연히 와인을 파는 한산한 카페를 찾게 됐다. 서점에서 구매한 책을 들고 카페에 갈 생각이었던 나는 그 카페에서 책을 읽기로 했다.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마시는 기분이란… 너무 평온해서 이 평온을 해치는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 정도였다. 진짜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나의 이전 여행들은 왜 늘 바빴을까? 이번 제주 여행을 통해서 내 안에 있었던 진정한 여행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은 것 같다.


 사실 과거에 내가 했던 여행은 지금 생각하면 나의 여행이 아니었고 남의 여행이었다. 모 커뮤니티에 ‘000 여행’이라고 검색해서 사진이 예쁘거나 댓글 수가 많은 게시물의 여행 일정이 그대로 나의 일정이 되기도 했고, 혹시나 여행 스케줄이 뒤틀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말도 안 되게 사소한 부분까지 미리 다 알아보아야 직성이 풀렸다. 그것뿐일까, 쉴 틈도 없이 관심도 없는 각종 박물관, 미술관에 방문하여 인증샷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사진을 찍고 다녔다. SNS에서 유명하다는 음식점을 찾아가 보면 말도 안 되는 대기가 기다리고 있었고 심지어 맛도 실망스러운 적이 많았다. 물론 누군가는 이런 여행 스타일이 편하고 잘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저런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여유를 즐기지 못한 것에 대해 늘 후회를 했다. (그렇지만 다음 여행에서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일상을 여행하듯이 살라고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 또는 휴식을 취하려 여행을 한다. 나 또한 비슷한 이유로 여행을 떠나는데 어느 순간부터 계획이 없는 여행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그저 남들이 간 곳을 나도 가야 한다는 욕심만 내려놓았을 뿐인데 여행의 부담이 줄어들었다. 미리 짜여 있는 계획이 없기 때문에 계획이 뒤틀릴 일도 없고, 어디론가 힘들게 이동할 필요 없이 그냥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가까운 맛집이나 카페에 가면 된다. 미리 인터넷에서 찾아서 간 음식점보다 이렇게 우연히 발견한 진짜 맛있는 음식점에서 느껴지는 행복은 두배이다! 이런 걸 세렌디피티라고 하던가. 또한 기본적인 예약만 한다면 그 어떤 일이 닥쳐도 충분히 그 자리에서 해결이 가능하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사서 걱정을 하는 것에 대해 조금 피곤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심각한 일들은 어차피 준비를 해도 못 막는다.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의미도 여행의 의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방법대로 살기보단 자신의 인생을 살고,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쓸데없는 걱정을 내려놓고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면 된다. 늘 무언가에 얽매이기보단 자신의 가치관이 담긴 인생의 큰 틀 정도만 세우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세세한 부분들은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힘들고 지쳤을 때 무리하기보단 쉴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한 것 같다. 실제로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무척 힘든 시기를 겪으며 삶의 가치관이 점차 이처럼 변화하였고, 덕분에 인생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아무래도 큰 깨달음을 얻었으니 다행인 것 같다.)


 사실 이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가져온 건 아니다. 갑작스럽게 여행 일정 중에 잠시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겨서 노트북을 가져온 건데, 지금의 이 좋은 감정들을 생생하게 남기고 싶어서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왔다. 만약 이번 여행이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이런 여유를 부릴 틈도 없이 노트북이 짐만 될 수도 있었지만 나의 브런치 첫 글을 제주에서 쓰게 해 준 노트북에게 참 고맙다. 점심때가 되어가니 어디선가 맛있는 바베큐 냄새가 나고 에어컨이 없는 이 곳의 공기가 점점 데워지고 있다. 이제 숙소에 노트북을 내려놓고 배도 채울 겸 시원한 어딘가로 이동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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