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슈슈 Jul 07. 2020

퇴사, 그리고 10개월 후

직장인이 되는 것에 실패하다.





퇴사 무렵, 퇴근 길에 본 노을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나는 작년 9월에 3년 간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였다. 내 인생의 가치관을 송두리 채 바꿔놓은 회사에서. 그리고 나는 여전히 백수이다. 솔직히 퇴사를 하는 시점에 내가 지금까지 백수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퇴사 후에는 무조건 취업을 할 줄 알았다. 여전히 백수인 내가, 나의 퇴사 여정과 그 후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한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늘 모범생이었다. 고등학생 때에는 학교에 있지 않은 시간에는 늘 독서실에 있었고 쉬는 것을 불안해했다. 그 결과 서울 소재의 대학을 순탄하게 합격할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동기들과 놀기도 해야 했고 아르바이트로 용돈도 벌어야 했으며, 동시에 성적관리를 하느라 나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이 외의 것을 한다는 것은 시간낭비였다. 내 인생의 목표는 늘 성적이었고, 쉴 줄 모르는 나는 늘 바빴다. 그래도 성적이라는 건 노력한 만큼 나오는 지라 시험이 끝나면 만족스러운 결과에 나에게 종종 성취감을 주곤 했다. 하지만 오로지 성적이 목표였던 나의 순탄한 인생은 취업 후 굴곡이 시작되었다.


 여느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취업 시즌을 겪게 되었다.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가리지 않고 서류를 넣었고, 다행히도 서류 합격은 잘 되었으나 늘 인적성 시험과 면접 전형에서 탈락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때만 해도 수많은 탈락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는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졸업한 지 몇 개월 후, 서울의 한 회사에 최종 합격을 하게 되었다. 사실 그 당시 기쁘기보단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공채가 많이 뜨는 하반기 시즌이 시작하기 직전인 8월이었고, 취준생 시절 틈틈이 영어 점수, 자격증과 같은 스펙을 최대치로 쌓은 상태였다. 또한 나는 남들에게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대기업에 가고 싶었는데, 내가 최종 합격을 한 회사는 중견회사의 계열사라서 회사에 대해 구구절절한 설명이 붙어야 했다. 하지만 늘 주어진 길대로 순응하며 살아온 나는 무모한 도전 따위는 모르던 사람이었기에 최종 합격한 기업을 포기하지 못하고 입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때의 선택을 직장 생활 내내 후회하게 될 줄 몰랐다.




사내 카페에서 지겹도록 보던 경치. 퇴사하고 보니 아름답다.

 나의 직장 생활은 입사 초반부터 순탄치 않았다. 사수라는 사람은 7년차 여자 대리였는데, 입사한 지 한 달도 안된 나에게 실무자 이상의 업무를 지시했다. 당연한 결과지만 여기저기서 실수가 발생했고, 영업관리 업무를 하던 나는 지점 사장들에게 수화기 너머로 험한 말들을 들으며 일을 배워나갔다. 그래도 이렇게 스파르타식으로 일을 배운 결과, 6개월 지나자 대부분의 업무에 익숙해지게 되었고 나의 회사 생활에도 잠시 안정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안정기도 잠시, 이어서 권태감이 찾아왔다. 업무에 익숙해지자 매일이 다람쥐 쳇바퀴 같았다. 업무 특성상 시간 단위로 해야 할 일이 짜여있었기 때문에 어제의 하루를 복사-붙여넣기를 한 느낌이었다. 학생 때는 성적이라는 것으로 성취감을 느꼈는데, 나의 회사 생활은 아무런 성취가 없었다. 또한 사내 정치질이나 불공정한 사례들이 점차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상사들은 자신의 실수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과 핑계를 일삼았고, 바른말을 하는 용기 있는 분들은 갑자기 퇴사를 하는 상황들이 잦았다. 불공정함에 순응하고 앞뒤가 다른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 이러한 소름 돋는 사내 문화를 경험하면서 이 회사에 안주하게 되면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회사를 다니면서 지속적으로 이직을 시도하였다. 입사 후 대기업 공채에 매 시즌 지원하였지만 여전히 인적성 시험과 면접 전형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또한 회사에 다니면서 면접을 보러 다니는 게 쉽지 않았다. 부서 특성상 연차를 내는 게 쉽지 않아서 한두 번 응급실 핑계를 대긴 했지만 아픈 척 연기하는 게 너무 어려워서 힘들게 잡힌 면접을 포기한 적도 있었다.


 계속적인 이직 실패와 더불어 끊임없이 괴롭히는 사수와 지점들로 인해 나의 멘탈이 점점 무너져갔다. 사수는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내 앞에서는 지점 사장들을 욕하면서도 바쁜 업무 중에서도 그 아저씨들과 20-30분씩 전화로 수다를 떨어주곤 하였다. 바로 옆자리여서 대화 내용이 다 들렸는데 사장들이 자식 자랑을 하면 사수는 듣기 좋은 호응을 해주는 식이었다. 하지만 난 그런 성격이 되지 못했다. 원래 어른들에게 살가운 성격이 아닐뿐더러 피상적인 수다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지점 사장들에게 업무적으로만 대했다. 하지만 사수는 이러한 내가 ‘차갑고 예의 없는 사람’으로 소문이 났다며 잘못 아닌 잘못을 지적했다. 나는 내가 일을 못한다고 생각하진 않았고, 서비스직이 아닌 나에게 업무 실력이 아닌 딱딱한 말투를 논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매년 연말이 되면 늘 내 나이에 대해 꺾였다, 늙었다는 표현으로 말로 관심을 보였다. 또한 나의 업무는 택배를 보낼 일이 많았는데 이러한 노동을 하고 있으면 사수는 나에게 가끔씩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런 일을 하고 있어서 부모님이 안타까워하시겠다~”라며 웃기지도 않는 위로를 건넸다. 이러한 일들을 자주 겪으며 내가 사수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근데 가스라이팅이라는게 참 무섭다. 알면서도 당하게 된다. 나는 무척 긍정적인 사람이었기때문에 처음에는 사수의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정신승리를 하려 했다. 하지만 3년 간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샌가 나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가스라이팅에 완전히 당한 것이다.


 지점 사장들과의 관계도 너무 힘들었다. 분명 좋은 분들도 계셨지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하루는 자리를 비운 사수의 자리에서 전화벨이 울려 대신 받은 적이 있다. 전화를 받아보니 평소에 직원들을 괴롭히던 악명 높은 지점이었는데, 문의 건에 대해 내가 설명을 하던 중에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나는 급하면 다시 전화가 오겠지 하고 그 사건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 다음날 사수는 나를 또 불렀다. 그 지점 사장이 말하기를 내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며 지점 사장들이 모여 있는 사무실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그 사건에 대한 억울함 뿐 아니라 ‘그동안 내가 알지 못하는 얼마나 많은 누명들이 나에게 씌워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의 나와 영원의 당신 - 손현녕

 이러한 회사 생활이 3년 간 지속되자 나의 마음은 병들어 갔다. 억울한 상황에도 나의 목소리를 잘 내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은 가슴에 응어리가 지는 화병을 불러일으켰고, 밝았던 성격의 나는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우울증 환자가 되었다. 심지어 내가 출근길에 차에 치여 죽으면 그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은 자극에도 시시때때로 눈물이 났으며, 주변인들에게 나의 힘듦을 털어놓아도 그들이 나의 심정을 온전히 공감을 해주지 못하고 가볍게 생각한다는 피해의식이 생겨 친구들에게 힘든 상황을 말하는 게 두려웠다. 말해봤자 진실된 공감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오히려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마음의 병은 신체의 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체한 증상과 두통이 나타났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에 무언가 걸린 듯한 느낌이 들어 병원에 가기도 했다. 3년여간의 직장 생활이 끝나갈 무렵 나는 몸도 마음도 다 망가져있었다. 직장 생활뿐 아니라 인생이 실패한 사람 같이 느껴졌다.




나의 최소주의 생활 - 샤오예

 이 당시에 내게 유일하게 위로를 해주던 것은 바로 책이었다. 세상에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지 몰랐다. 일방적으로 작가의 이야기를 읽은 것이지만 나의 심정을 온전히 공감받는 느낌이었다. 책을 통해 위로를 받았을 뿐 아니라 28년 만에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기 시작했고, 타인의 말에 휘둘리던 나는 나만의 가치관을 점차 세워나갔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점차 ‘퇴사’라는 단어가 자리 잡게 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게 고민이 되었다. 사실 다니던 회사가 연봉도 나쁘지 않았고, 야근도 별로 없는 부서였다. 하지만 퇴사를 하면 재취업을 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내년까지 한참 남아있는 적금과 몇 개월만 더 다니면 받을 수 있는 명절 상여 등이 떠올랐다. 심지어 퇴사에 적합한 계절까지 따지고 있었으니 사실상 그 당시에는 최대한 퇴사를 하지 않을 이유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상태는 점차 악화되었고, 문득 내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젊음과 건강을 안정적인 월급에 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바로 퇴사 의지를 회사에 말했다. 그리고 나는 약 한 달 뒤에 퇴사를 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퇴사를 결정한 순간부터 몸과 마음이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작년 가을, 도서관에 다니며 마주한 풍경

 퇴사 후 계획은 대기업 공채에 마지막으로 시도해보는 것이었다. 퇴사 후 준비를 하면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다른 회사에 다니면 직장 생활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퇴사할 당시만 해도 그 이후는 계획하지 않았다. (솔직히 어디 한 군데는 합격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 공채 역시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사실 퇴사 후에도 늘어난 시간만큼 열심히 공채를 준비하지 않았다. 대신 그 시간 동안 그동안 늘 무언가에 쫓겨살며 지나쳤던 주변을 돌아보고 나를 돌아봤다. 중학생 때부터 다니던 도서관에 인적성 공부를 하러 가는 길에는 처음으로 여유롭게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었고, 알록달록 색동옷을 입은 나무들을 보며 우리 동네의 가을이 이렇게나 아름답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가을이었다.

 



꽃들의 시간 - 정주희

 취업준비를 하던 시간보다 주변을 관찰하고 책을 읽는 시간이 더 많았던 나는 우연히 플로리스트에 대한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그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플로리스트에 관한 모든 책들이 나를 위한 직업이라고 외치는 것 같았지만 당시의 나는 여전히 직장인이 되고자 하는 취준생이었다. 하지만 우선 취미 삼아 한번 배워보자는 가벼운 생각으로 취업 준비를 하면서 플로리스트 학원에 등록했다. 가볍게 시작한 꽃 수업은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었다. 최종면접 전 날에는 학원을 빠질 만도 한데 꽃이 너무 배우고 싶어서 굳이 학원에 갔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카드였던 그 최종면접에 탈락했다. 사실 최종면접 발표가 나던 날, 긴장감에 집에 있을 수가 없어 혼자 연남동으로 산책을 나왔다. 갑자기 날아온 탈락 소식을 접한 뒤 절망스럽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몹시 허망했다. 그런데 그날도 내 가방 속에는 플로리스트 책이 들어있었다. 절망감을 추스르고자 예쁜 카페에 가서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며 그 책을 읽었다. 그리고 탈락의 슬픔도 잠시, 나는 설레고 있었다. 내 가슴속에서는 ‘이왕 상황이 이렇게 된 거. 한 번 사는 인생, 용기를 갖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도전해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 인생의 새로운 길을 열어준 꽃

 나의 계획 대로라면 재취업에 실패하면 아무것도 없는 미래였는데, 신기하게도 나는 현재 하루하루 설레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내가 이미 알고 있고 경험한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다. 두려움과 고정관념에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던 틀 밖으로 나오니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이제 깨달았다. 나는 직장 생활과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회사도 나와 같은 사람을 원하지 않으며, 나도 회사 생활을 원하지 않는다. 서로 원하지 않는 관계인데 억지로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살기로 하였다. 나는 직장인으로서 완전히 실패하였지만, ‘나’를 알게되었고 플로리스트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다. 실패는 새로운 시작이다.







작가의 이전글 무계획 여행의 매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