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우연은 아닐거야(출산후기)
이 글은 바로 전 글에 남겨 놓은 떡밥을 회수하는 글이다.
유도분만으로 아기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제왕절개를 진행했다. 다행히 큰 진통을 겪었다거나 긴급하게 제왕절개 수술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기가 내려오지 않고, 자궁문도 충분히 열리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제왕절개를 한 후 아기는 급하게 어딘가로 향했다. 아내도, 나도 울고 있는 아기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정말 잠깐이었다. 그리고 평화롭지 않은 병원의 공기는 분명히 찜찜함을 주입하고 있었다. 그래도 별 일 아닐거야라는 생각으로 기다렸다.
아내의 후처치는 남들보다 조금 긴 듯했다. 수술을 마친 의사 선생님은 다른 부위를 봉합하는 수술이 추가됐다고 한다. 아기의 태반이 자궁을 깊게 파고들어, 태반이 떨어지는 과정에서 자궁이 상처를 입고 출혈이 생겼다고 한다. 출혈이 잘 잡히지 않아 출혈부위를 봉합하는 수술을 추가로 진행했으며 다행히 봉합 후 출혈은 멈췄다고 한다. 걱정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지만 반대로 오히려 소름 돋을 정도로 다행인 이야기였다. 만약 자연분만을 진행했더라면 아내의 출혈은 더 상당했을 것이며, 출혈 부위를 찾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출혈 부위를 찾았더라도 출혈을 멈출 방법은 오로지 수술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 아내는 진통은 진통대로, 분만은 분만대로 다하고 이어 바로 수술대로 향하는 일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제왕절개를 하기로 한 선택은 흔히 말하는 '신의 한 수'였다. 우리 아기가 일부러 엄마를 위해서 밑으로 내려오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아기가 밑으로 조금이라도 더 내려왔으면 우린 자연분만의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갔겠지. 그럼 아내는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더 많은 고생을 해야 했겠지. 어쩌면 끔찍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었겠지. 아가야 고맙다..
아기는 3.85kg으로 태어났다. 이미 머리 지름은 10cm에 달하고 있다는 것은 초음파 촬영으로 인해 알고 있었다. 태어난 아기를 보고 병원 관계자들은 다들 한 목소리로 말한다. 초산에 이 정도 아기 자연분만하는 거 거의 불가능하다고. 아내가 제왕절개를 하게 된 것은 분명 아기 때문이다. 좀 과장해서 상상하자면 아기는 본인이 자연분만으로 태어날 시 엄마가 많이 힘들어질 거라는 것을 알고 열심히 위에서 버텼나 보다.
아기가 어디론가 황급히 가버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생아실에서 전화가 왔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이었다. 신생아 집중치료실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대체 왜 41주가 지난 이때, 이렇게 늦게 아기를 낳았냐고 혼내듯이 이야기를 한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의사 선생님의 의견을 따라 분만 시기를 정한 거라며 대역죄인처럼 대답했고, 이어 선생님은 아기가 좋지 않은 상태라며 아기의 상황에 대해 설명한다. 태변을 본 지 꽤 된 거 같다며 일단 산소치료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NICU(신생아집중치료실. 저체중 출생아나 어떠한 질환을 가진 신생아를 집중적으로 관리 · 치료하는 부문이다)에는 아직 들어가지 않았고 더 안 좋아질 경우 NICU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심하게 쉬지 않고 보채고(계속 보채는 것은 아기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자가호흡이 잘 되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라 계속 산소를 흘려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 밖에도 아기의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 말씀하셨는데 머리가 하얘지면서 다른 말들은 잘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심각한 선생님의 표정과 어조에 놀란 티도 낼 수 없을 만큼 놀란 나는 "아기 생명엔 지장이 없는거죠?"라고 말하며 희망의 눈빛을 보냈는데 선생님은 그 희망을 갈구하는 눈빛에 완벽한 어둠을 뿌렸다.
그건 지금 장담 못 드려요
하늘이 무너진다. 세상이 노래진다. 눈물이 온몸에서 분출된다. 그때 내가 무슨 표정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신생아실 앞에서의 나는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회피하고 싶은 기억이다.
선생님은 밤새 산소치료를 하며 아기의 상태를 지켜보자고 한다. 인사를 드리고 표정을 수습하며 아내에게로 돌아간다. 우린 1인실이 없어 잠깐 좁은 다인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회복 중인 아내에게 절망적인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실제로 아기는 NICU에 들어갈 만큼 위독한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여기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기가 태변을 좀 먹은 것 같아서 일단 산소 흘려주는 치료를 하며 지켜보자고 하신다고, 심각한 건 아니고 혹시 몰라서 하는 치료니 크게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 아내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부정적인 생각 안 하기로 약속했다는 듯이 의연하려 애쓰고 있었다.
얼마 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나는 아기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신생아실로 향했다. 신생아실 선생님은 특별히 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은 상태라며 계속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현재의 산소포화도가 정상 수준이라는 것이다. 선생님은 근심 어린 내 표정을 보고 특이사항이 있으면 바로 연락을 드리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새벽 네시쯤 콜을 해주겠다고 하며 나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새벽 한 시쯤 됐을까. 신생아실에서 전화가 왔다. 잠깐 신생아실 앞에서 볼 수 있느냐고. 약속된 시간이 아니었기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아내가 놀랄까봐, "아까 전화 주시고 다시 한번 아기 상황 알려주신다고 했어서, 잠깐 다녀올게."라고 선한 거짓말을 남기고 신생아실로 향했다. 내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 심장은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불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선생님은 벌벌 떠는 내게 얼른 말을 꺼내셨다.
너무 걱정하는 것 같아서 아기 상황 말씀드리려고 일찍 불렀어요. 아기가 이제 잠도 자고 산소포화도도 안정적이에요. 좋아지고 있어서 새벽 네시에 굳이 아기 상황
전달 안 해도 될 것 같아서 잠깐 보자고 했어요. 좋아지곤 있지만 혹시 몰라서
산소는 계속 흘려줄 거예요. 대신 산소량을 조금씩 줄여가며 아기의 자가호흡이
원활한 지 확인할 거예요. 지금까지는 상황이 좋아지고 있으니 굳이 새벽에 깨지
마시고 푹 주무세요.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연락 드릴텐데 연락 없으면 오히려
좋은거니 너무 염려 말고 계세요.
정확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금씩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이 말을 전할 수 있어서 기뻤다. 하지만 기도는 계속된다. 우리 예쁨이 건강하게 해 주세요.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어떤 데미지도 남지 않게 해주세요..
아내에게 돌아온 나는 들은 대로 전했고 아내는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 새벽 잠깐 자고 일어났다. 다섯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다시 눈을 붙이려고 하는데 눈만 감으면 아기 생각이었다. 참을 수 없었다. 다시 신생아실로 향했다. 벨을 누르고 선생님에게 아기 상황을 알고 싶어서 다시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다행히 계속 좋아져서 산소 주입 없이도 자가호흡이 잘되고 산소포화도도 계속 안정적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과 지옥을 넘나드는 순간이었다. 산소를 땠으니 이제 아기를 보여드릴 수 있다며 아기가 눕혀진 바퀴 달린 아기침대를 가려진 커튼 아래로 들이밀었다. 잉??? 이게 누구람. 출산 직후의 예쁨이와는 너무 다른 모습으로 자고 있는 아기의 모습에 많이 놀랐지만 아기가 바뀌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눈 앞에 아기를 우리 아기로 인정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내와 많이 닮아있었고, 출산 직후 어렵사리 찍은 사진의 얼굴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우리 아기 맞다. 나는 그 새벽에 신생아실 창 앞에서 예쁨이를 부르며 인사를 나눴다. 아기가 배속에 있을 때 엄마의 피부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를 기억할텐데, 지금 내가 말하는 목소리가 통유리창을 지나서 아기에게 전달될 때 비슷하게 들리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더 열심히 이야기를 건넸다. 기다리는 선생님과 복도를 지나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의 새벽잠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도 (미안하지만)들지 않았다. 그때의 내 세상은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아내와 아기 말곤 그 누구도 없었다.
그리고 그 날 낮, 우리 예쁨이는 다른 아기들만큼 잠을 자고, 다른 아기들만큼 밥을 먹고, 다른 아기들만큼 운다고 한다. 보통은 기적이다. 우리 예쁨이는 보통이 되었다. 반면 아내는 후불을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지금은 아기가 태어난 지 13일째이다. 우리 예쁨이는 누구보다도 잘 먹고 잘 싼다. 잘 움직이고 잘 자고 잘 운다. 그리고 부모의 좋은 유전자를 받아 정말 훌륭하게 잘 생겼다.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다. 내 눈에만 그런 게 아니다. 아내 눈에도 그렇고 다른 가족들 눈에도 그렇다니 이건 분명 객관적인 통계이다.
아내는 진정한 엄마다. 하루 종일 본인을 깎아서 아기를 성장시킨다. 내가 아빠인 건 아직 실감이 안되는데 아내가 엄마인 것은 분명하다. 출산과 성장은 당연한 순리인 것 같지만 기적의 연속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아내야 고맙다.. 아가야 고맙다..
내가 단언하기로는 임신과 출산의 기억만 잘 가지고 가도 아내에게 잘하게 된다. 잘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아기에게 더 바랄게 없다. 건강하기만 하면 감사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나는 잊지 않기 위해 유독 자세히 적어댄 것이다. 여보 진심으로 사랑해. 아가야 진심으로 아껴. 소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