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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형지 Nov 21. 2021

당신의 신체상은 어떤가요?



 각설하구, 오늘 컨디션도 좋은김에 잡담을 해볼까 하는디. 근래 겪어낸 에피소드가 의식 저편에 고이 잠들어있던 주제를 건드렸걸랑. 항상 정리해 보고 싶은 개념이기도 했고, 여러 인간들의 의견도 듣고 싶었던 부분이라 허심탄회하게 써보려구. 그렇다고 기승전결 제대로 짜서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할 자신은 없다. 그럴 능력도 없다. (미리 엄포) 명확한 근거와 충분한 예시를 들어가며 이 포스트를 멋들어진 비평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지만, 그 소망에 비해 내 소유의 지식과 경험, 공부량이 턱도 없이 부족하걸랑.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암튼. 주절주절 서문을 연장시킨 주인공은 <신체상>이다. 신체상에 대해 사전적 의미를 빌려 간단히 설명하면, '신체에 대하여 갖는 느낌이나 태도로서, 자신의 신체 부위와 기능에 대한 만족의 정도'를 말한다. '신체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할 이들을 위해 조금 더 상세히 서술하자면 



 신체적 만족의 정도가 높으면 긍정적 자아개념을 형성한다. 신체상은 자아개념이나 외부 세계를 인식할 때 기초가 되는 중요한 과정으로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신체상을 가지고 있다. 신체의 지각과 개념 및 신체와 관련되어 있는 감정을 포함하여 신체상을 형성한다. 신체상은 자아 구조의 기초이며 성격 형성의 핵심 요소이자 성격발달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신체상은 겉으로 보이는 외모뿐만 아니라 신체의 구조, 기능, 지각 능력, 운동력 등을 포함하고 자신의 신념, 가치, 목표, 성격,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견해 등이 통합되어 형성되며 환경에 대한 반응을 결정하기도 한다. 


 성인기나 노년기에 접어들면 신체는 노화되고 그에 따라 신체상이 수정된다. 신체상은 자아인식과 관련이 깊고 개인의 주관적 경험으로서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형성되고 발달된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신체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수용하고 적절한 신체상을 가져야 하며, 신체상에 대한 심한 왜곡은 자기혐오나 병적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정도가 되겠다. 실제로 간호진단에 '신체상 장애'를 들어 정서 간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각개에게 신체는 자아를 인식하고 표현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내가 오늘 언급할 '신체상'은, 자아 경험의 총합에서의 신체상이 아닌 말 그대로의 신체상(모양, 형상 상像)에 관한 단상이라는 것을 미리 알린다. (물론 본질적으로는 같은 의미다. 방향이 어디에 있냐의 차이일 뿐.)


 최근 너무도 쉽게 "그렇지만 쟤는 머리가 너무 크잖아", "걔는 완전 못생겼잖아", "걔는 성괴잖아", "자기관리도 안 하고 완전 배 나왔잖아", "왜 이렇게 부었어" 와 같은, 신체, 혹은 물리적 상황만으로 한 영혼을 판단하고 단정 지어버리는 인간을 만나게 되었다. 상대를 인식하고 분별하는 기준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천차만별이고 각양각색이겠으나, 지나치게 외적 면모에 가치를 두거나 취향과 선호를 넘어 폄하, 비난이 더해질 때 '과연 그 방식은 존중받을만한 것인가'를 고려케 된다. 처음에는 그 의중과 시작점을 헤아려보려고 노력했다. 세간이 아름답다 칭하는 것들을 많이도 봐온 탓에 미적 기준이 유난히 높은 것일까, 그 역시 외모지상주의와 루키즘이 만연한 사회 속 피해자일 뿐일까, 타고난 외적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별다른 주의점이나 거리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저 성향일 뿐일까, 부정적 신체상을 상대에게 투영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력이 있는 걸까, 외모가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우선의 혹은 직접적인 가치라고 여길 만한 사건이 있었던 걸까. 온갖 이유를 가져다 대어보지만 답의 실체는 점점 희미해져 갈 뿐, 오리무중 간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저 상대의 문화·지적 수준과 외적 기준에 대한 감수성, 경계심이 조야하다는 (또 다른 편견을) 결론으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건지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나의 경우 주변인들이 외모나 모양새만으로 섣불리 인간을 판단하거나 재단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나 역시 세상의 중심이 내부에 위치한 탓에 나, 혹은 나와 관련된 것을 제하고는 큰 관심과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자연히 겉면에 주요한 의미나 가치점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간혹 외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를 바탕으로 상대에게 단단한 편견을 세우는 자들이 거쳐가곤 했지만, 그들과는 하나같이 깊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조금 더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극혐'했다. 보여지는 것, 드러나는 것, 외적 영역에 사방으로 휘둘리는 군상들과는 나는, 생애 끝에서도 결코 섞이지 못할 것이라고, 그렇게 확신하며 살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과연 진정으로 그럴까. 나라고 다를까? 이 글을 기회로 반추 삼아 나에게 솔직해져 보기로 했다. 외적 면모를 두고 상대를 판단하는 '사고'에 주의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입 밖으로 내뱉기를 경계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에 비열하고도 일말의 죄악감 없이 외면을 끌어들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나. 반대로 멋진 외모를 지나치게 찬양하고 그에 사로잡혀있진 않았나. 그야말로 외모를 이야기하는 데에 최악의 민감성을 가진 자는 다름 아닌 내가 아닐까. 늘 자신이 예쁘다고, 멋지다고, 이상향의 분위기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동시에 '그래도, 조금만 체중 감량을 더하면 더 예쁠 것 같다.', 혹은 '얼굴이 좀 더 대칭이거나 볼에 볼륨이 조금 더 있으면 훨씬 어려 보이고 깔끔할 것 같다.',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뾰루지 따위에 갖은 신경을 몰아 '이 녀석을 짜고 자야겠다' 등의 이중적 사고를, 분명 오늘 아침에도 했던 것 같은데. 


 사실, 모든 인간은 각기 다른 세계관과 중점을 두는 인지관이 있기에 위처럼 옳고 그름과 가치의 경계선을 따지고 들자면 한도 끝도 없는 지난한 이야기가 펼쳐질 거다. 그렇다고 이를 통합적인 시선으로 깔끔하게 서술할 자신도 없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토록 혼란스럽고도 부정확한 가치관들의 무질서한 혼합 속에서도, 때때로 몸은 여전히 강압적이고, 탐욕적이며, 과시적이지만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는 그저 신체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자는 거다. 


 간호사로서 살아가는 것은 때때로 고되고 품이 들기도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삶을 윤택하고 부드럽게 하는 지점들이 꽤 많다. (내가 좀 더 부지런하다면 그 풍요로움에 대해서 생생하고 선명하게, 그리고 조금 더 자주, 너르게 여러분께 전달할 수 있을 텐데. 스스로도 과욕인 걸 알고 있다. � 그저 오늘처럼 근무 일지에 쫌쫌따리로 풀어갈 예정) 그중 하나가 바로, 신체상 스펙트럼이 남부럽지 않게 넓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목에 손가락 마디 두 개만 한 구멍이 뚫려있어도, 

뇌를 한 움큼 잘라내 두개골이 움푹 패어있어도, 

손가락, 발가락, 팔, 다리, 혹은 어떤 기관이 없어도, 

그나마 남아 있는 사지와 얼굴마저 마비가 되었어도, 

발끝과 손끝이 까맣게 썩어 들어가도, 샛노랗거나 푸르뎅뎅한 피부색을 띠어도, 

전신에서 진물이 흐르고 역한 냄새가 진동을 해도,

장의 일부가 체외로 돌출되어 있거나 통째로 없을지라도, 

온몸이 오래된 석고처럼 굳고, 부식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해 보여도,

들리지 않아도,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없어도, 숨 쉬지 못해도.


하나의 신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흔하디 흔하고 숱하디 숱한 각개의 물상이자 모양일 뿐이라고,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얼굴이 조금 부어도, 혹은 각이져도. 팔 다리가 짧거나 길어도, 키가 크거나 작아도. 체구가 적어도 커도. 

입술이 두꺼워도, 얇아도. 눈과 귀가 작거나 커도. 피부가 얇아도, 두꺼워도, 어두워도, 밝아도, 주름이 져도.

콧구멍의 크기가 제각각이어도. 눈썹이 옅거나 짙어도. 털이 적거나 많아도. 

쌍꺼풀이 있거나 없어도, 볼이 파였거나 빵빵해도. 눈동자가 작아도, 커도, 혼탁해져도.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몸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인체를 도형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저 약소한 차이의 각도와 크기를 가졌을 뿐인. 


 우리는 자연의 천태만상을 당위로 수용하며, 그 모습 자체로 대상을 부정커나 판단하지 않는다. 잠자코도 안온히 피고 지는 꽃의 아름다움에 "근데 쟨 암술이 너무 뾰족하고 꽃잎이 많아"라고, 또는 알알이, 다정하게 익어가는 사과의 탐스러움에 "얜 심하게 동그랗고 시뻘게"라며 반박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꽃과 나무와 돌, 새와 물고기, 하늘과 산, 바다에게 "넌 왜 이렇게 크고, 작으며, 얇고, 두꺼워 제 각각이냐"라고 타박하거나 비아냥대지 않는다. 설령 그렇게 인식하여도 그것이 그들의 전부라고 여기거나, 문제점이라 치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대상이 인체가 되는 순간, 상황은 반전된다.


 자연의 일부인 인체 역시 '자연'스럽고, '자유'스럽게 이야기될 순 없을까?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상대에게 요구하고 강제하는 것은 참으로 일방적이다. 자연스럽지 않다는 얘기다. 일개인이 오래도록 축적되온 사회문화적 차별과 혐오에 맞서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인 관점과 감상에 머무르며 일방성을 고수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다. 그러니 다양한 양방성을 위해 몸에 대한 유연한 관점을 접할 기회가 잦아졌으면 좋겠다. 신체는 인생을 풍요롭고도 역동케하는 삶의 동반자이자 조력자라고 여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체가 그 무엇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신체에 대하여 동경하고, 불신할 수 있을지언정 그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거나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쁘게도 날이 갈수록 외모나 외적 지향에 대한 이해도 및 사회적 수용의 범위가 넓어지는 추세다. 그 긍정적 변화에 더불어 매체와 시스템이 임의로 '아름답다' 지정하고 주입한 단일한 신체 이미지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자기 관리'라 말하지 않는 세상으로의 전환을 소망한다. 어떤 것을 짓고, 수확하고, 생각하며, 나누고, 성장하는 것 등이 '자기 관리'와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왜 좋은 몸인지, 어떤 것이 좋은 몸인지, 그를 왜 가져야만 하는지, 과연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욕구인지를 먼저 고려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모든 이에게 균등하게 주어지기를, 그리하여 타인의 신체, 혹은 타인과 비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자신을 탐구하고 사유하는 것이 타당한 문화로 자리 잡길 원한다. 


그래서 나는, 그저. 전날의 나보다 조금 더 따뜻하고, 조금 더 사랑이 넘치며, 

조금 더 성장하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의 심신을 돌볼 뿐이다.

마지막으로 듣고 싶다. 당신의 신체상은 어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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