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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형지 Jan 17. 2021

저승사자의 발걸음


일을 하다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오늘은, 혹은 이번 주는 저승사자가 중환자실을 돌고 있는 게 틀림없구나' 하는 때가.


언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컨디션의 환자들이 수없이 입출하곤 하나

하루 이틀 사이에 잇달아 많은 인원이 생과 사를 달리하는 일은 드문 편인데, 

이번 주 중반 이틀간, 시간으로는 24시간 안팎으로 5명의 인원이 삶을 마감했다.


그중 1명은 본인의 듀티에 직접 돌보던 자였고, 2명은 본인의 간호를 받았던 자들이었다.

'중환자실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예삿일이나 돌보았던 환자들이 연이은 사망은

어쩐지 이질감이 오르게하고 말로 설명 못할 씁쓸한 잔상을 그들이 떠난 침대 곳곳에 남겨두었다. 

  




A,B,C,D,E 다섯 환자의 얼굴은 모두 다른 형상이지만 본질은 같다.

핏기와 따듯함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누렇게 오른 피부와 가죽만이 

사망선고를 내리는 의료인과 그를 지켜보는 보호자를 맞이한다. 


임종을 맞는 그 찰나의 순간에 누군가는 기도를 하고, 누군가는 사랑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뿐이라고, 

그러니 안심하고 가라고 인사한다.

어쩐지 그 말이 자신을 위안키 위해 되풀이하는 문장처럼 들린다. 


어떤 이는 남편의 뇌사 판정을 받아들이지 못해 적극적인 치료를 고집하다 결국 백기를 들었다.

장기기증 전날 많은 보호자가 차례로, 고요하게 면회를 마친다. 

그들의 눈가만큼이나 분위기가 무겁게 젖어든다. 


한 의사는 오래, 자주 봐 온 환자였는데 이 죽음이 안타깝다고 덧붙이며 사망선고를 한다.

사망시간과 선고가 그의 입술을 떠나자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는 망자의 하나뿐인 아들은 

담당 간호사의 눈물샘을 후벼판다. 이제 막 철천지 고아가 된 자의 설움이 병실 곳곳에 퍼진다.  


눈물도 잠시 사후 처리를 위해 기계처럼 차트를 보고 문서작업 및 보호자 안내를 하는 

내가 따뜻한 온기를 느끼기 힘든 시체나 다름없다 느껴졌다. 

퇴원이나 회복이 아닌 사망으로 인한 '퇴실'은 그 황량함을 대변하듯 퇴실 서류에도 

사망시간과 '사망' 한 줄로만 정리되어 마무리된다. 그렇게 다사다난 했던 한 사람의 인생이 매듭지어진다.



 


한때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삽입되고 고정되었던 수많은 도관들이 놀라울만큼 무용해졌다.

특히나 당장 사망해도 이상할 구석이 없던 마지막 환자는 중심정맥관, CRRT 투석관, 

동맥압 측정관, 기관삽관, 온몸의 드레싱과 테이프 등으로 신체를 점거당했는데 

그만큼 사후 처치에도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마지막으로 소지품까지 정리하고 보호자에게 인계한다.

장례식장 직원들이 뒤이어 도착해 능숙한 손길로 환자를 포로 감싸 이송한다. 

문을 열어주는 길에 보호자 한 명이 고맙다고, 수고하셨다고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내가 수고한 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Unstable 한 Vital을 모니터링하며 승압제를 조절하고 중장비를 통해 폐의 환기와 

혈액의 정화를 돕게 한 것? Mentality와 pupil 사정을 수시로 해본 것?

이미 기능을 다한 심장을 살려보려고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것?


그것이 수고라면 나는, 


당신들이 찢어지는 심장을 겨우 붙잡고 심폐소생술을 멈춰달라고 했을 때,

혹은 적극적인 치료를 중단하고 장기이식을 결심했을 때,

이미 직감으론 알고 있지만 애써 아닌척하며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늦추고자 했을 때,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눈을 희번덕하게 뜨고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모습으로 묵묵부답인

당신의 가족, 친구, 지인을 지켜봐야 했을 때. 혹은 이 모든 치료 과정을 힘없는 몸뚱어리로 

전력을 다해 버티고 있는 환자 본인이 겪었을 고통스러운 수고에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기력해지지 않기 위해 그저 망자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는 것으로, 

이제는 편안히 쉬시라 눈을 감겨드리고, 가시 같던 도관들을 빼어드리는 것만으로

스스로 잘 해내었다 위안한다.  그 같잖은 자기 위로마저 없다면

속수무책일 저승사자의 발걸음에 맞서기 위해서.


그리고 하루 빨리 저승사자의 중환자실 퇴실을 기원한다. 

각자의 수호천사들로 가득하여 '사망' 한줄 대신 호전으로 

'전실, 퇴원'하는 서류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지길 기대한다. 

부디 환자와 보호자들의 입가에 작은 미소 한 줄 걸리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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