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사는 친구 집에 갔다가 대봉시를 얻어 왔다. 감나무를 부러워하는 나를 위해 친구는 마침 감을 딸 때가 되었다며 장대를 휘둘렀다. 두 상자나 담아 주기에 마다치 않고 가져왔지만 저장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웃에 나눠 주고, 깎아서 바람이 잘 드는 창가에 매달고, 남은 것은 베란다에 신문지를 깔고 펼쳐 두었다.
감이 익기를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여삼추였다. 여러 날이 지났건만 땡글땡글한 채로 감감무소식이니 감질이 났다. 보름이 지나서야 겨우 한 개가 익었다. 그날부터 들락날락하며 익은 감을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며칠 후, 아침을 짓는데 베란다가 소란스러웠다. 힐끗 보니 직박구리 두 마리가 정신없이 감을 쪼아대고 있었다. 놀라 달려가 거실 유리문을 열었다. 새들은 더 놀랐던 모양이다. 한 마리는 열린 창으로 한 번에 쑥 날아갔지만, 다른 새는 닫힌 창에 부딪히고 말았다. 되돌아가 다시 날고 또 부딪히느라 야단이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탈출했지만, 바닥엔 깃털이 낭자했다.
먹다 남긴 홍시를 보니 입맛만 다시다가 만 듯했다. 모른 척할걸. 주인입네, 하고 쩨쩨하게 문을 열어서는 먹지도 못하게 했으니 미안했다. 그런데 잠시였다. 계속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실컷 먹도록 내버려 두었다. 저녁녘에 보니 홍시 한 개가 얼추 없어졌다. 그만하면 되었다 싶어 새가 들어오지 못하게 창을 닫아버렸다.
다음 날 새 세 마리가 창밖 난간에 앉아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참 있다가는 날아갔다가 또 와서는 뚫어져라 보곤 했다. 그런데 내 눈에 그런 건지, 새들의 눈빛에 원망이 가득했다.
혹 저 새들이 친구네 집에 있던 그 새들인가,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집착할까. 가지를 수시로 드나들며 일 년 내내 공들여 키운 감을 생전 보지도 못한 여자가 나타나 다 싸 갔다고, 염치없는 아줌마라고, 동네 새들을 불러 데모라도 하러 온 건가. 무안스러워서 감 한 개를 창틀 너머에 슬쩍 놓아두었다.
오며 가며 보니 새들은 겨끔내기로 왔다 갔다 하며 종일토록 쪼아댔다. 한 개는 야박하다 싶어 한 개를 더 줬다. 그런데 새들의 식사법이 보통 점잖은 게 아니었다. 쪼았던 쪽만 쫄 뿐, 다른 쪽은 입질도 하지 않았다. 먹을 것을 발견했을 때 남이 먹지 못하도록 침으로 묻혀서 내 것으로 확보해 놓았던 기억이 있던 나는 뜨끔했다. ‘새만도 못했구나.’ 며칠 사이에 창틀 너머 난간은 새들의 식당이 되었다. 처음엔 직박구리만 오더니 산비둘기와 까치, 까마귀까지 날아와 다 먹어버렸다.
한 달가량 여행을 다녀오기로 되어 있었다. 대봉시가 걱정이었다. 냉동고도 김치냉장고에도 빈자리가 없었다. 이참에 인심이나 쓸까 싶었다. 우리가 먹을 것은 베란다에 남겨 두고, 나머지는 새들에게 주기로 했다. 기왕에 근사하게 한 상 차려 주고 싶었다. 나뭇가지를 엮어 창틀 난간에 고정하고 나니 산길 아래 감나무집이 생각났다. 담벼락 아래에 감나무잎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빛깔이 고운 이파리를 골라 가져왔다. 가지 사이사이에 끼우고 그 위에 대봉시를 올렸더니 제법 감나무 느낌이 났다. 멀리서 보면 우리 집은 홍시가 주렁주렁한 ‘감나무집’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남편은 감을 안으로 들여놓으라고 성화였다. 애써 따 준 친구의 성의를 무시한다느니, 무겁게 들고 와서 새한테 다 준다느니 했지만 나는 “이 대봉시들은 원래 얘네들 것이었어요.” 하고 대꾸질했다. 새들에게서 받은 것에 비할까. 이사 와서 사는 동안 사시사철 밤낮으로 들려주는 노랫소리에 얼마나 행복해했던가.
여행을 떠날 때는 고민이었다. 베란다 창을 열어두어야 할지, 닫아야 할지…. 열자니 새들이 들어와 남겨 둔 감까지 다 먹을 것 같고, 닫자니 식물이 걱정이었다. 망설이다가 바람이 들락거릴 정도로만 빼꼼히 열어놓고 갔다.
한 달 후에 돌아와서 보니 감은 흔적도 없었다. 난간 밖은 물론이고, 베란다에 있던 대봉시도 사라져 버렸다. 널브러진 감꼭지와 군데군데 떨어진 붉은 살점 몇 개가 이곳이 감이 있던 자리라고 말해 줄 뿐이었다.
그때, 산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왔다. 난간에서 서성이는가 싶더니 천연덕스레 문틈으로 들어와서는 들깨나무 끝에 앉는 게 아닌가. 직박구리 한 마리도 들어와 동백나무에 앉았다. ‘그 많은 대봉시를 뺑줄치고 새퉁스럽기는!’ 나는 있는 대로 눈을 부라려보았지만 두려워하기는커녕, 눈을 맞추고 제집인 양 목청껏 노래까지 했다. 기가 눌렸다.
새들이 집의 주인 같았다. 한 달 사이에 우리 집의 점유권은 새들에게로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화초 사이를 감나무 가지인 양 넘나들며 두리번대는 모양이 ‘까치밥’을 찾는 게 분명했다. 절로 눈이 흘겨졌다. ‘새대가리라니! 까치밥이라도 남겨 두지 않고!’ 그런데 내 눈에도 발그레하고 야들야들한 홍시가 아른거리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여행 가방을 풀다 말고 시장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대봉시가 남아 있었다. 한 상자를 사 들고 와서 베란다에 풀어놓고 보니 감나무집 주인이 된 것 같았다.
감나무가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 소원이었던 나는, 그렇게 해서 그날 처음으로 직박구리와 산비둘기, 까막까치랑 한집 살림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