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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금아 Nov 01. 2024

봄편지




 

 "어느 날, 종가댁 맏며느리 같은 분이 다가와 삼 년 동안 일 천여 통의 편지로 저를 붙잡아 앉혔습니다."*


  지인이 보내온 수필집의 서문을 읽다가 이런 문구를 발견했다. 수신인과 발신인 사이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궁금해지면서 1천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인연이 부러웠다. 문득 지난 한 해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속을 드나들던 손 편지 한 장이 생각났다.  

  몇 번이나 미룬 끝에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매번 그쪽에서 날짜를 잡았고, 취소한 쪽은 나였다. 후일 연락하겠다고 해놓고도 하지 않았다. 손주를 돌보느라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지만, 나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말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그날은 일방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알려왔다. 

  그녀는 점심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 당신으로서는 조금 불편할 수 있는 일을 다시 떠올리며 몇 번이나 고마워했다. 그러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손주를 키우신다고요? 소문 듣고 꼭 밥 한 그릇 사고 싶었어요.”

  그녀도 딸네 애들을 키웠다며,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이 손주 키운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손주들이 주는 기쁨으로 산다는 말을 덧붙였다.

  왕 전복에 인삼에 해삼까지 영양 듬뿍한 돌솥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그녀는 차를 마시러 가자며 일어섰다. 작은 되 한 되는 들어갔을 법한 대추차로 속을 데우고 나니 이번엔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집이 있단다. 삐걱거리는 좁은 나무 계단을 오르면서도 꼭 잡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카페 통유리창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오래된 집들의 지붕 위로 얼기설기 늘어진 전깃줄에 날개를 접고 앉은 참새들이 깊은 적요를 불러일으켰다. 그녀가 가방을 열더니 평소 좋아하는 것 같아서 사 왔다며 모자를 꺼내어 씌워주었다. 그러고는 찻잔 옆에 분홍 봉투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놓는 게 아닌가. 놀란 눈빛으로 물었더니 집에 가서 열어 보라며 내 가까이로 빵 접시를 내밀었다. 

  하양과 연분홍, 연파랑 장미 세 송이가 그려진 봉투엔 손 편지 한 장과 오만 원권 두 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엔 꽃을 보내고 싶어 장미 봉투를 골랐다는 말과 함께 손주를 키우던 날의 소회가 담겨있었다. 다음날 직장에 갈 딸이 깰까 봐 우는 아기를 업고 새벽 세 시에 놀이터로 나간 적도 있다는 대목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막 100일을 넘은 손주를 키우느라 지쳐있을 때였다. 할머니가 되어 갓난아기를 돌보자면 밥 한 끼 편히 먹을 여유조차 없었다. 어쩌다 시간을 내어 나간 모임에서 듣는 입찬소리에는 더 힘이 빠졌다. "제일 바보가 손주 키워주는 할미라는데요?" "나중에 원망만 들어요." 어떤 이들은 아예 겁박 조였다. "늙고 병밖에 안 남아요." 자식들이 부탁할 때 눈 딱 감고 거절했다는 말이 무용담처럼 들려왔고, 용기와 과단성이 부러웠다. 

  그래도 그런 말들은 참을 만했다. "한창 수필을 써야 할 땐데······." 그 말은 넌 이제 쓰지 못할 거라는 선험적 예언처럼 들렸다. 과연 글은커녕 생각을 요구하는 카톡 하나 제대로 보낼 수 없었다. 읽기라도 하려고 새로운 책들을 사들였지만, 밤이 되어 아기를 재우고 책장을 열면 금세 코를 박고 졸기 일쑤였다. 아침이면 나보다 아기가 먼저 깨어 울었다.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날이 흘러가면서 영영 못 쓸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밀려왔다. 

  그때마다 그녀가 떠올랐다.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이 손주 키운 거라던 말이 "평생에 제일 어려웠던 일이 손주 키운 거랍니다."로 의역되어 들려오면서 얼마나 힘들면 그리도 비싼 밥을 사주고 한방차에 고급 빵에 커피까지 사주었을까, 그것으로도 모자라 손 편지를 쓰고 돈까지 담아주었을까 싶었다. 다음날 일을 하러 가야 하는 딸을 위해 새벽 세 시에 우는 아기를 업고 놀이터로 갔었다는 말은 그때껏 내가 읽었던 어떤 문장보다 감동이고, 위로였다. 

  꼭 1년이 지났다. 잊은 날 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를 떠올렸으니 나도 그새 천 통이 넘는 편지를 받은 셈이다. 책을 보내준 지인이 받은 1천여 통의 편지가 지인을 “붙잡아” 앉혔듯이, 그녀의 손 편지 한 장이 나를 “붙잡아” 앉혔다. 덕분에 나도 조금은 단단해질 수 있었다. 

  다음 달이면 손주가 어린이집으로 간다. 한 달의 적응 기간이 지나면 내게도 노루 꼬리만큼 자유시간이 난다. 그때는 내가 먼저 만나자는 편지를 보내야겠다. 약속을 잡으면 길치니까 며칠 전부터 가는 길을 꼼꼼히 살펴야지. 그리고 그날은 사방 천지에 피어날 봄꽃처럼 아침 일찍 길을 나서야지.      

*김애자, 『수렛골에서 띄우는 편지』, 수필과비평사, 2008년. ‘책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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