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원 수칙 제1호
“우리는 어린이집을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치는 아이부터 인사를 건네는 작은 일에서부터 내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 아이 모두의 부모가 되고자 한다.”
공동육아를 처음 시작했을 때 접하게 되었던 조합원 수칙 첫 번째 항입니다.
이 수칙을 처음 봤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엄마였는데도 뭔가 비장한 마음이 들었어요. 아, 나, 이제부터 이렇게 살아야 되는구나! 나, 이제 모든 아이의 부모가 되어야 하는구나!
보통, 엄마들은, 앞에 수십 명의 아이가 있는 조건에서도 오직 내 아이만 눈에 들어온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귀신 같이 내 아이만 보인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제 이 아이들 모두의 부모이니까,,,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치는 아이에게 일단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내 아이에게로 직진하지 않기. 이걸 마음으로 계속 되뇌었습니다. 안 그러면 까먹기 일쑤니까요.
주변에 낯선 어른이 있으면 먼저 말을 거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아이는 뭔가 낯설었습니다. 외계 생명체 같달까, 어른의 대화 문법이 통하지 않는 존재에게 어떻게 다가가는 게 좋을지 몰랐습니다. 내 아이와는 전혀 다르니까요. 게다가 아이를 데리러 가면 모든 연령의 아이들이 뒤엉켜 마당에서 놀고 있었거든요. 제 눈에는 그냥 아수라장으로 보였습니다. ㅎㅎㅎ
그렇게 어색해하며 눈 마주쳐오는 아이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습니다. “안녕! 난 아라야. 저기 있는 하늘이 엄마. 너는 누구인지 물어봐도 돼?” 한 아이와 얘기하고 있으면 다른 아이들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동물원 원숭이 보듯,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신기한 건 그렇게 말을 걸어 인사를 나누고 나면 그 아이가 성큼 저에게로 한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다음 날은 먼저 아는 척도 해 주었거든요.
공동육아어린이집은 엄마가 데리러 가면 곧바로 엄마 손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어린이집이 아니었습니다. 엄마가 오든 말든, 더 놀고 가고 싶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엄마가 집에 가자고 할까 봐 숨거나 우는 아이도 있었다면 어떤 분위기인지 느껴질랑가요? 그러다 보니 다른 아이들을 지켜볼 기회도, 엉겁결에 같이 놀 기회도 많았습니다. 대뜸 나무로 된 과일을 먹으라고 내미는 아이에게 없는 영혼을 끌어모아 먹는 척해 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몇 번 인사를 건네고, 조금 놀아주고(?) 나면 많은 아이들은 후하게 선물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날 종이로 접은 방금 제작한 팽이, 무엇을 그린 건지 알아볼 수는 없지만 마음만은 알 수 있는 그림, 그날 나들이길에 주운 돌... 그런 것들이 아이들의 선물이었습니다. 저는 일단 소중하게 받아서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예쁜데... (처분은,,,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ㅎㅎ 그날로 홀랑 버리진 않았어요.)
선물보다 기뻤던 것은 인사를 했을 뿐인데 다다다 뛰어와서 안길 때였습니다. 다른 아이를 안아보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제 아이와는 냄새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양감도, 그립감(?)도 달랐거든요. 그렇게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순간들이 생겼습니다.
긴 시간이 흘러 초등방과후에서 생활하던 중, 아이들에게 갈등이 생겼습니다.
교육이사로서 아마(=아빠 엄마)들과 모임하면서 차근차근 다양한 방법을 써 보고 아이들 관계에 대해 치열하게 공부도 해 가면서 해결을 위해 애쓴 것은 사실입니다(이 이야기는 여기에 https://brunch.co.kr/@arachi15/178). 제가 고등학교 시절 유행했던 우스갯소리 ‘급훈’이 있었습니다. <네 엄마가 보고 있다>. 제가 아이를 키우면 어려운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되뇌인 구절도 비슷합니다. <네 아이가 너를 보고 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너무나도 강력한 주문이었습니다. 아이가 나를 보고 있으니 바르게 살아야 한다, 잘 살아야 한다. 그래야 한다.
아이들이 보고 있으니 함부로 말하고 행동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제 아이를 힘들게 했던 아이가 흔쾌하게 수용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땐 참 미운 짓을 한다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하면 안 되고,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어리석은 행동까지 가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이성이 저를 붙잡고 있어 어떤 말과 행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 속마음은 그 아이가 예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만 마실을 원할 때,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힘들 땐 약간 거리를 두는 것도 괜찮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있을 때 거리를 두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듯, 아이가 본인이 원하는 친구와 마실을 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원치 않는 아이와 마실을 억지로 하게 할 수도 없고, 삼삼오오 이루어지는 마실까지 꼭 그 아이와 해야 할 이유는 없지요. 그럼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마실 때문이 아니라 흔쾌하지 못한 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들이 마실 금지도 하고, 공부도 하고, 아이들에게 따돌림은 옳지 않은 거라고 얘기도 했지만, 다른 아이를 힘들게 하는 아이들을 마음으로 다시 받아들이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이는 달랐습니다. 마실 금지 기간 한 달이 지나자마자 아이는 그 아이와도 마실을 원했습니다. 이미 다 잊고 스스럼없이 어울려 놀았습니다.
다른 엄마에게 속마음을 고백했습니다. 아이들은 이제 아무 문제가 없는데, 제가 문제라고요. 아이보다 마음이 좁고 아이보다 못났다고요.
결혼 생활 20년 넘는 동안 부부 싸움하고 그날을 넘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자주 버럭 하는 스타일인 건 맞는데, 오래 가는 타입은 아닙니다. 싸움도 먼저 걸고, 싸우고 난 뒤 말도 제가 먼저 겁니다. 사실 화도 먼저 냈기 때문에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공격한 아이는 쉽게 용서가 안 되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약속이 있어 집 근처에 들르셨다가 하룻밤 주무시고 가신다며 엄마가 오셨습니다. 이런 날, 아빠는 거실행입니다. ㅎㅎㅎ 아이가 할머니를 엄청 좋아합니다. 아이와 엄마와 할머니. 셋이 나란히 자려고 누웠습니다.
아이가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합니다. 달리기 하다가 친구가 아이를 밀쳤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엄마는 지금 누구 엄마야?”
저의 대답에 아이가 투덜거렸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딱 한 마디 하셨습니다.
“저런 저런. 오늘 꿈 속에서는 그 녀석에게 가서 똥침을 한 대 놓아 주자.”
그랬더니 아이가 푸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정말 거짓말같이 순식간에 감정을 흘려보내더라고요.
그 날부터 저도,
아이처럼, 저에게 찾아오는 미움이라는 감정을 똥침에 실어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ㅎㅎㅎ
아이가 다시 마실 초대를 시작한 하기 시작했을 때에서도 몇 개월이 더 지나서야 제 감정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아이는 이제, 알아서 똥침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엄마, OO이가 나한테 OOO 해 놓고 사과도 안 하고 가 버렸어. 오늘은 OO이한테 똥침 한 번 할려구. ㅋㅋㅋ”
집에 와서 친구들이랑 나눠 먹을 간식을 챙기면서 OO이 것도 야무지게 챙기더라고요. 아이는 불쾌한 감정, 미운 감정을 저보다 훨씬 빨리 털어 버립니다.
미운 마음이 들면 똥침에 실어 보내자.
할머니에게 배웠고, 아이에게 배웠습니다.
똥침 날릴 일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기는 합니다. ㅎㅎㅎ
아이는 어린 시절 잠깐 괴롭게 하기도 했던 아이와 단짝이 되었습니다. 고학년이 되어서 둘은 매주 한 번씩 엄마와 저녁을 먹지 않고 둘이 떡볶이를 먹으러 다녔습니다. 아이에게 친구로 남아 주어 고맙기만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관계가 노력 여하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고,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 진짜 단단한 관계가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옆집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배웠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곳은, 세상의 아이들을 돌보던 곳입니다.
창신동, 난곡...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던 그 곳에서,
돌봄 기관이라고는 없어,
아이들을 집 안에 둔 채, 문 잠궈 놓고 찬 밥상을 차려 놓고
공장으로 일하러 나가야 하는 부모들이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던 그 곳에서,
천막을 치고 동네 꼬마들을 돌보던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시작했던 저의 스승이자 정신적 부모와도 같은 분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분에게는 피를 나눈 자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분은 "세상 모든 아이들"의 부모였습니다.
저 같이 세속적이고 속 좁은 분들이 아닙니다.
저는 그 혜택을 아이와 함께 다 누렸습니다.
이제 제가 받은 혜택들을, 제가 누린 것들을 이 세상과 어떻게 나누어야 할까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표지 이미지> Image by Aamir Mohd Khan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