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라 Apr 04. 2022

내 남자의 화장실 사용법

남자의 화장실 사용과 여권 신장의 상관관계

- 엄마, 나 오늘 서서 쉬하다가 다리가 젖었어.


아이는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OO(별명), 여자는 서서 쉬 하면 안 돼?" 물어보았고, 화장실에 가, 서서 오줌을 누었다고 했다. 아이가 다닌 공동육아어린이집에서 아이의 담당 반교사는 남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남자는 자고로', 또는 '여자는 말이야'를 운운하며 된다, 안 된다를 말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렇지, 그렇지. 이게 바로 젠더 감수성이지! 나는 감탄을 하며 선생님에 대한 존경 레벨을 한층 높혔다. 아마 한 번 해 보라고 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이가 화장실에 가서 서서 오줌을 누었겠지. 그랬더니 다리가 젖었다고 집에 와서 이야기한 것이다. 아이는 지금 1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인데, 5-6세 때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나는 사실 이 이야기를 아이가 10대 중반쯤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아이의 아빠인 나의 배우자는 화장실을 앉아서 사용한 지가 꽤 오래 되었다. 그러니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남자 아이들이 소변기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낯설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더 편리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소변기에서는 바지를 살짝 내리면 되지만 양변기에서는 바지를 전부 내려야 하니까 말이다. 아이는 '남자는, 여자는' 하는 고정관념을 하나도 듣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앉아서 용변을 보는 것이 다리도 젖지 않고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집에서 남자인 배우자가 화장실을 앉아서 사용하게 된 것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화장실의 청결과 화장실 청소의 편리함 때문이었다. 화장실 변기를 청소하다 보면 소변이 튀어 있는 것이 냄새도 나고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앉아서 사용하면 훨씬 깨끗할 것 같다는 의견을 전하며 대화를 나누었고 화장실 청소를 나 혼자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도 스스로 느낀 바가 있어 쉽게 공감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그 어떤 의견 대립도 없었고 그길로 배우자는 앉아서 화장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앉아서 용변을 보기 시작하니 변기도 깨끗하게 유지되고 화장실 청결도가 확 올라갔다. 깨끗한 변기에서 용변을 해결하는 일은 가족 구성원 모두의 삶의 질이 올라가는 일이기도 했다.

우리집은 현재 화장실이 2개인데 안방 화장실은 주로 내가 사용하고 거실 화장실은 대체로 아이와 아빠가 함께 사용한다. 청소도 마찬가지로 안방 화장실은 내가 담당하고 거실 화장실은 배우자가 청소를 담당하고 있다. 우리 가족 안에서는 남자인 배우자가 양변기를 앉아서 사용하는 것이 그 어떤 논란도 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 일을 '남자의 자존심'과 연결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글은 몇 년 전, 한 일간지에 실린 칼럼이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남자가 줏대(?) 없어져서인지 여권의 신장인지, 아니면 페미니스트가 늘어서인지 알 수는 없으나 요즘 앉아서 오줌누는 남자가 많아졌(단)다. 화장실 문화가 달라진 탓도 있을 듯. (중략)
조준을 잘못해 지리기라도 한다면 마누라의 쌍심지를 각오해야 한다. 아니, (좌변기 커버를) 들고 소변을 보아도 오줌발이 사방에 튄다. 불결하고 청소하기 번거롭다고 매번 핀잔을 바가지로 듣는다. 모두 초기에는 마누라의 강요에 자존심 상하고 불편해 버티기도 하지만 집요한 잔소리와 구박을 견딜 재간이 없어 대개는 지시에 따른다. 이상하게도 나중에는 오히려 편해진다.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렇게 한다.
- (출처: 이태호, "꼭 앉아서 오줌 눠야 할까? 남자가 기피하는 속사정", 중앙일보, 2019.07.09)


이 분은 분명히 앉아서 양변기를 사용하신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칼럼을 보면서 의아함과 불편함이 느껴졌다. 첫째, 화장실을 앉아서 사용하는 것이 더 깨끗하고 청소에도 도움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 하는 점이 매우 의아했다. 둘째, 그 댁에서 화장실 청소를 여성만 도맡고 있다는 걸 모르시나, 하는 점에서 불편했다. 세상이 많이 달라진 것도 맞는 것 같은데, 이 발언으로 볼 때, 우리나라 여권 신장은 정말 아직도 한참 멀었다. 여성이 자신의 느낌, 생각과 의견을 말한 것이 남성의 자존심으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성이 이렇게나 화장실 청소를 전담하고 있는데 같이 사는 남성이 그걸 고맙다고 느끼지 못하고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나와는 다른 사람의 느낌, 생각과 의견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나에게 그런  불평의 말을 하면 안 되는 인간이 나의 명예나 실존을 공격하는 것으로 느껴진 것 같다. 작가 김찬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타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관계 맺고 소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격을 나누고 가치를 매긴다. 물론 일의 세계나 공식적인 시스템에서 기능과 효율을 위해 그러한 서열을 세우는 것은 필요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러한 영역을 떠나서 사람 자체를 본질적으로 위계화하고, 거기에 사회적인 명예나 실존의 가치까지 결부시키는 것이다.

 - 김찬호, <모멸감>, 12쪽 중에서


이 시점에서 동등한 두 인간이라면 '자존심이 상한다' 말고 다른 걸 느끼고 깨닫지 않았을까? 예를 들면 이런 것들. '아, 오줌이 튀면 변기가 더려워진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구나. 그걸 깨닫게 해 주는 배우자가 참 고맙네. 게다가 그 더러운 걸 지금까지 기꺼이 청소해 주고 있었구나. 이제까지 고마웠다고 말해야지. 그리고 화장실 청소를 나의 배우자에게만 떠맡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으니 나도 이제부터 청소를 해야겠다.' 뭐 이렇게...


한편 이 칼럼에서 인용한 비뇨기과 의사라는 분의 칼럼은 정말 한 술 더 뜬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스트레스로 버겁게 살아가는 중년 남성들에게 앉아서 소변보라는 부담을 주지 말자. 약해진 소변 줄기에 은근히 주눅 들어있는 남자들에게 자꾸 야단을 치면 배뇨장애가 심해지고 빨리 늙는다. 남성들은 정확하게 조준하고 요령껏 마무리를 잘해서 소변이 튀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 (출처: 심봉석, "남편에게 앉아서 소변보라 부담주지 마라", 헬스조선뉴스, 2018. 12.18.)


으아아악. 이게 대체 무슨 글인가? 반박할 가치도 없지만, 반박할수록 위 칼럼이 가치있어지는(?) 느낌이라 말을 줄여야겠다. 남성으로서의 우월함을 양변기에 서서 오줌누는 것 정도에서 느끼는 남자라면 정말 찌질한 남자라는 것을 너무 잘 알겠다. 나이들어감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고 따라서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들면 소변줄기가 약해질 것이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그 사람의 문제이지, 여성이 야단쳐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여성보다 우월한 남성들이라면 더더욱 자기 문제를 여자에게 들고 오지 말고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서서 변기를 사용하고 싶다면 조준하고 마무리하는 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냥 자기가 튀었으면 자기가 청소하면 된다. 그 정도는 여자든 남자의 삶의 기본 아닌가? 자기가 어지른 거 자기가 치우는 거. 요즘 그 정도는 남녀 불문하고 어린이집에서 유아들에게도 가르친다.

한편 맨 위의 칼럼을 쓰신 분은 남자의 양변기 사용 문제에서 여권 신장과 페미니즘의 요소를 발견하셨다 했는데 어떤 점에서 이 대목은 아주 본질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기와 여성 인권이 직접적인 관련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들이 남성의 소변으로 인한 변기의 더러움, 변기 청소의 불편함과 어려움을 말하게 되었다는 점은 페미니즘의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여성이 무엇을 말하는 것 자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남성들에게는 여성이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페미니즘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가부장제가 본질적으로 권력의 문제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부장제의 본질은 권력과 서열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이렇게 말한다.


"여성의 눈으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무엇을 본다는 것은 동시에 무엇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의 가치에 대한 정의는 ‘객관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가치 판단에 의한 선택의 문제를 함의하며, 그러한 선택의 원리에는 권력 관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정희진, <아주 친밀한 폭력>, 교양인, 71쪽)


남성들이 여성의 눈으로 내가  소변 자국을  번만 살펴 보았으면 좋겠다. 여성의 관점에서 이제까지 우리집에서 가장 더러운 변기를 누가 청소해 왔는지 알아차리고 최소한의 감사를 표현할  있기를 바란다. "여성의 눈으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여성의 눈으로 보아야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린다. 여성의 눈으로 보아야 가부장적 관계 안에서 권력이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할  있다.

여남 모두를 억압하는 가부장제가 조금이라도 변하기를 바라며, 여성들은 경험 속에서 느낀 불편함, 일상 속에서 느끼는 부당함을 더 많이 말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남자도 알게 된다. 여성도 여성이기 이전에 남성과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전에는 여성이 말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여성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불편한가? 이는 여권 신장이 아니고 응당 그랬어야 하는 거다. 왜냐. 여성도 자신만의 고유한 감정과 생각을 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옛 가부장제처럼 여성은 말할 수 없고 남성만 말할 수 있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남성은 설마 없을 것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서로 다른 목소리가 소통할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이제까지 유일한 것으로 군림해 온 목소리가 조금 낮아질 때, 비로소 다른 목소리가 들리게 된다.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파괴하는 것은 가부장제지, 여성의 '직설적인' 목소리가 아니다.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52쪽)

매거진의 이전글 부부 간에 낭만 각본은 필요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