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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Mar 19. 2022

부부 간에 낭만 각본은 필요 없다

남녀의 연애각본을 벗어난 부부가 생일을 즐기는 방법

'연애 각본'이라는 개념이 있다. 김고연주는 미국의 사회학자 로스와 슈워츠를 인용하여, 이성애 연애에는 문화적 화법이 있다고 하며 이를 '연애 각본'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 각본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다른데 남자는 대체로 적극적인 행동을, 여자는 소극적인 행동을 하기로 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남자는 데이트를 제안하고, 계획을 세우고, 여자를 데리러 가고, 운전을 하고, 돈을 내고, 문을 열어 주고, 집에 데려다 주지요. 반면에 여자는 남자가 주도하기를 기다리고,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거절할지 결정해요. 《나의 첫 젠더 수업》(김고연주, 76쪽)


우리 부부는 결혼 전부터 전통적 '연애 각본'을 내려놓기 위해 노력했다. 연애는 그가 먼저 제안했지만 결혼은 내가 먼저 제안했다. 이는 결혼 후에도 이어져, 가능하면 평등한 부부 관계, 가부장제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부부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와 노력을 했다. 결혼 초에는 평등한 부부가 되기 위한 합의문을 작성해 서랍에 보관해 놓고 지키기 위해 노력한 적도 있고,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보다는 둘이 함께 돈을 벌고 함께 가사노동과 육아를 분담하는 쪽을 선택하고 이를 위해 노력 중이다.


오랜 시간에 걸친 갈등과 조정과 노력 끝에 나의 배우자는 가사노동과 육아를, 내가 너무 많은 집안일을 도맡아 힘들어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해내고 있다. 측정은 어렵지만 아무래도 내가 조금은 더 많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지하여 그는 내가 하기 싫어하는 몇 가지 - 음식쓰레기 처리, 바닥 걸레질 등등 -는 스스로 도맡아 하기도 한다. 부부가 함께 의논하지만 자신의 본가와 관련한 집안 대소사 및 그와 관련된 소통은 각자가 맡아서 한다. 며느리가 시가 경조사까지 도맡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노력이 어쩌면 너무 '소소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어쩌면 가치관이 맞고 이런 노력을 함께 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난 것이 작은 행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한편 이렇게 한다고 불평등한 세상이 당장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가부장제와 성별 불평등의 문제는 좋은 남자(?) 만나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며, 뿌리 깊은 역사적 배경이 있고 정치, 경제, 사회적인 영역의 걸친 문제라는 것도 안다. (얘기가 너무 크게 번졌으니 이 부분은 여기서 끊고,,,)


암튼 최소한 부부 사이에서 가능한 만큼의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려면 나도 내려놓을 것들이 있었다. 결혼 몇 년 차였던가?


- 아라: 저번에 도둑 들어서 집에 있는 금붙이 다 가저갔잖아. 이제 나도 하나 갖고 싶은데 생일날, 목걸이 하나 사 주라.

- 마루(남편): 그래, 예쁜 걸로 하나 사. 돈은 여보가 다 갖고 있으니까.

- 아라: 뭐? (잠시 정적) 푸하하핳. 


나는 정말 빵 터졌다. 이 남자는 예기치 않은 대목에서 전통적 연애 각본이 없을 때가 있다. 이 답을 듣고 곧 나도 더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육아와 집안일은 함께 하기를 바라고 평등하기를 바라는데 왜 남자만 여자에게 꽃이나 값비싼 선물을 해야 하는가. 왜 기념일은 남자가 여자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가. 그렇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책임을 지우지도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집안의 가계는 내가 관리하고 있고 우리 둘은 각자 필요한 만큼의 용돈을 받는 구조였다. 알량한 금액의 용돈을 모아 선물을 사려면 진짜 원하는 걸 알아도 사기가 어려웠다. 그래, 내가 갖고 싶은 건 내가 사면 되지. ㅎㅎㅎ 그 날 이후 생일 선물은 서로 돈으로 받아 각자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날로 바뀌었다.


TMI지만, 사실 우리도 결혼  상대방을 위한 선물을 준비한 적이 있었고 필요한 것을 헤아려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좋았다. 근데 생일이란  1년에   꼬박꼬박 돌아오다 보니 신선한 선물 아이디어가 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방이 정성들여 준비한 선물이 마음에  드는 경우도 있었다. 각자 원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선물하기 시작한 이후 우리는  만족스러운 생일을 보내고 있다( 믿는다). ㅎㅎ 이렇게 낭만이라고는 없는 우리의 생일 의식이 마음에 든다.


,  하나 생일에 배우자를 위해 서로가 하는 일이 있는데, 그건 미역국을 끓여 아침상을 대접하며 서로의 탄생(?) 축하해 주는 것이다. 결혼  내가     먹고 저녁에 즉석 미역국을 끓인 날을 제외하고는 꼬박꼬박 지키고 있다. 처음에는   오직 미역국끓였는데 ㅎㅎㅎ 지금은 불고기도 준비하고 잡채도 준비하고 많이 업그레이드 되었다. 이건 약속에 없는 거니 언제나 고맙다. 케이크는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으로 골라 온다.


그날 이후 나는 ‘ 생일 기억하나,  하나 보자’, '무슨 선물 준비하나 보자류의 애정 테스트는  이상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상대방이 기억하고  맘에  드는 선물을 하면 상관 없는데 혹시라도  먹으면?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선물을  오면? 결국 그러면 나는 1년에   돌아오는 생일에 기분만 나빠질  있고 둘의 관계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만무하다.  1년에   있는 생일을 최고의 기분으로 보내고 싶어, 아예 기분 나쁠  자체를 만들지 않는 쪽을 택했다.  행복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행복조차 남자에게 기댈 필요는 없다. 여자도 주체적인 인간이다. 각자의 행복을 만드는  배우자의 존재가 도움이 되니 함께 사는  거다. 우리는 생일  아니라 모든 기념일에 기억하네,  하네 식으로 다툰 적이 없다. 그는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혼자 머리 쥐어 뜯으며 이벤트나 선물을 준비할 필요가 없고 나도 마찬가지다. 이미 열흘 전부터 내 생일 D-10,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고 생일이  주에는 아예 “생일 주간 선포하여 이번 생일 주간에는 잔소리는 삼가해 , 등의 를 위한 특별한 요청을 하기도 한다. 생일 주간 일주일을 진심으로 즐기며 보낸다.


낭만적인 이벤트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식으로 매우 주체적인 생일과 기념일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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