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친은 오빠, 여친은 너?
우리 부부는 캠퍼스에서 맺어진 커플로, 내가 같은 과 2년 선배인 연상연하 커플이다. 처음 만난 날부터 연애하는 내내, 결혼한 직후까지 그는 나를 '누나'라고 불렀다.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된 지 10년 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10년을 '누나'라고 부르다가 결혼했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상견례 자리에서까지 오랜 버릇대로 '누나'라고 불렀을 정도다. 시가와의 첫 대면 때 대문을 들어서자 마자 들뜬 표정으로 해맑게 웃으며 "엄마, 누나랑 왔어요."를 외쳐 2초 간의 정적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나의 남자 친구였다.
그는 나의 절친에게 '여성학' 학습을 받았고 여성학에 관심이 많아 열심히 공부하는 진정 사랑스러운 후배였다. 연애를 할 때도 언제나처럼 '누나' 호칭을 사용했다. 그는 연애를 시작하면 당연하다는 듯 "이젠 너라고 부를께"(이승기의 노래 '내 여자라니까'의 가사다)를 시전하며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흔한 남자는 아니었다.
나 역시 연상의 남자와 연하의 여자가 연애하면 어린 쪽이 나이 많은 쪽을 '오빠'라고 부르는데, 연상의 여자와 연하의 남자가 연애를 하면 '누나'라고 부르지 않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이상한 현상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명명백백 서열 정리였다. 공자의 나라 중국이 울고 갈 유교 적통의 계승자임을 자랑하는 동방예의지국 우리나라에서 나이가 일반적으로 서열을 정리하는 제1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동방예의지국 서열 정리의 제1의 기준은 남자인가, 여자인가이다. 그게 아니라면 왜 연애만 시작하면 아무리 나이 많은 여자와 연애를 해도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부르겠는가. 남자가 여자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호칭의 역전 현상임이 분명하다.
이미 페미니즘에 홀릭이었던 나는, 그 전형적인 연애 각본에 반발하고 싶었고 그가, 남자가 당연히 서열이 위라고 생각하는 흔한 남자가 아닌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남녀의 짜여진 듯한 로맨스 각본으로 나를 몰아가는 남자가 아니었고 나도 그 각본대로 따르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가 너라고 불렀다면 '너라고 부르면 죽는다!'고 답했을 것이다. 그는 연애를 하는 5년 내내 내게 반말을 하겠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그와 5년 동안 주고받은 교환 일기는 언제나 '누나'로 시작되었다.(아하하. 갑자기 손발이 오그라든다.) 이렇게 가부장적인 선입견이라고는 없는 그가 좋았다.
결혼 후 호칭을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결혼을 해 부부가 되는 것은 나이와 관계 없이 대등한 관계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나이가 적든 많든 상관 없이. 다른 부부들이 결혼 후에도 '오빠'라고 부르는 걸 부자연스럽게 느꼈던 것처럼 결혼 후에도 그가 나를 '누나'라고 부르는 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대화 끝에 '~씨'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로 했다. 잘 버릇을 들여가고 있었는데 어색해지는 장면이 종종 발생했다. 대학 때의 친구나 선후배들을 만나면 교통정리가 안 되었다. 내가 남편 친구들(=내 후배들)과 있는 자리에서는 후배들의 이름을 부르니까 갑자기 남편이 도로 후배로 보였다. 그런 자리에서는 그냥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반대로 내 친구들(=남편의 선배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가 나에게 '씨'라고 부르면 나의 짖궂은 친구들은 한 목소리로 들고 일어나 "어디, 결혼했다고 선배한테 ('씨'를 붙였지만서도) 이름을 부르냐"며 그를 구박해 대서 그는 내 친구들과 있을 땐 알아서 몸을 사리며 누나 호칭으로 회귀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거치며 '씨'라는 호칭이 익숙해져 가나 했는데 복병이 등장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였다. '씨'라는 호칭은 이름까지 합하면 세 글자인데 아이 낳은 후엔 이 호칭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이 즈음부터 우리는 서로를 여보, 여보야 등으로도 종종 불렀던 것 같다. 여보,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하면 답답해서 반말이 튀어 나왔다. 여보야!
그러던 와중에 또 하나의 큰 변화의 계기가 등장했는데 그것은 공동육아어린이집에서였다.
우리는 아이를 4살 때부터 공동육아어린이집에 보냈다. 공동육아어린이집은 국공립어린이집이나 민간어린이집과는 다른 점이 많은데 그 중 가장 다른 점은 운영 주체가 부모들이 만든 협동조합이라는 점이다. 또 아주 독특한 문화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호칭이다. 이 곳에서는 모든 어른들이 별명을 사용한다. 교사도 별명을 사용하고 부모도 별명을 사용하며, 아이들은 '선생님', '철수 엄마', '영희 이모' 같은 호칭 대신 선생님과 부모들 모두에게 별명을 부른다. 21세기에 옛 대가족으로 회귀하는 듯한 이모, 삼촌 문화가 아닌 것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나이로 서열을 정할 필요가 없는 별명 문화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별명을 사용하게 되면서 부부 간에도 서로 별명을 부르게 되었다. 입에 붙이기 힘들었던 '씨' 호칭보다 편하고 좋았다. 옛 선후배들을 만나도 별명을 사용하는 것은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분노를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우리는 10년을 이 별명으로 서로를 부른 후 지금도 별명을 사용한다.
부부 간에는 서열이 불필요한 대등한 호칭으로 잘 정리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아이와 아이 친구들까지 나를 별명으로 부른다는 사실이 짜릿하게 좋다. 나이와 관계 없이 사람과 사람으로 누군가와 수평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공동육아에서 배웠다. 그래서 우리는 여보, 여보야 호칭대신 서로를 별명으로 점점 자주 부르게 된 거다. 이제는 여보를 쓰든, 별명을 부르든 공동육아에서 함께 배운 것이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느낀다.
양가 부모님은 이 문화권이 아니기 때문에 양가 부모님에게 서로를 지칭할 때는 '씨' 호칭을 사용한다.
그런데 아직도 남은 문제가 있다. 그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서로를 지칭해야 할 때 쓸 수 있는 적당한 용어를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를 모르고 나만 아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도 모르게 대화 중 별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던지 상대는 얘기를 한참 듣다가 “ㅇㅇ이 남편분이세요?” 물었다. 아차. 우리만 쓰는 별명으로 지칭하니 상대가 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신랑, 신부는 뗀 지 오래다. (결혼한 지가 10년이 훨씬 넘었는데 웬 신랑, 신부?) 그냥 ‘남편'이라고 지칭할 때가 종종 있는데 그 단어도, 그 반댓말도 마음에 안 든다는 게 문제였다. 무엇보다 남편이 타인에게 나를 지칭할 때 '아내'라 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안해'에서 나온 말로 알려져 있는데 그 뜻은 '안사람', 그러니까 집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심지어 나는 집 안에 있지도 않는데? 그 반댓말인 남편은 '바깥사람'이라는 뜻이다. 남편, 아내하는 호칭은 정말 가부장제의 향기가 물씬 나서 사용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영어를 쓰자니 자신의 여성 배우자를 '와이프(wife)'라고 부르는 경우는 많지만 남성 배우자를 '허즈번드(husband)'라고 부르기에는 뭔가 어색했다. 아는 분들 중에는 '옆지기'라는 지칭을 사용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것도 입에 잘 붙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 부부의 마음에 쏙 드는 지칭 용어를 발견하지 못해 이것 저것 돌려 막기로 사용해 보면서 고민 중이다. “그냥 우리 별명을 쓰는 게 어때?” 며칠 전 그가 문득 생각난 듯 제안했다. 우리의 현재까지의 잠정적 결론은 그냥 남들에게도 별명으로 지칭하는 방향으로 모아지고 있다.
어쩌면 이럴까. 어떻게 수평적으로 살고자 하는 부부가 서로를 지칭하기 적합한 말이 없단 말인가. 안사람=아내, 바깥사람=남편. 이런 용어를 21세기에 써야 한단 말인가?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신조어들이 난무하는 시대인데, 부부가 서로를 지칭할 적절한 용어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나? 이런 사실 자체가 가부장적 제도와 문화권에서 부부를 수평하고 대등한 관계로 상정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혹시 적절한 용어를 발견한 분들 계시면 제보를 바란다. 아직도 서로를 지칭할 용어를 발견하지 못한 우리는 오늘도 방구석에서 조금 더 나은 대안을 모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