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라 Mar 09. 2022

집안일을 분담하려면  '이 일'부터

집안일을 분담의 핵심은 '시간성'이다!

결혼 전 나는 집안일이라고 하면 요리, 설거지, 청소, 빨래만을 떠올렸다. 그런데 집안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결혼 4-5년차 쯤 남편과 집안일 배틀을 해 보았을 때에야 겨우 깨닫게 되었다. 집안일 배틀을 통해 집안일들을 목록화해 보니 일단 그 수와 종류가 정말 많고도 다양했다.

첫째로 깨달은 것은 요리, 설거지, 청소, 빨래라는 이름으로 퉁치는 네댓 항목 안에 수많은 세부 내용이 있다는 것이었다. 요리와 설거지 등이 정말 요리와 설거지 두 가지 행위로 끝나려면 장보기, 집안 양념류와 냉장고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하고, 음식쓰레기 처리, 싱크대 배수구 청소, 가스렌지 청소 등이 덧붙여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소라는 한 항목 안에 청소기 돌리기 외에 먼지 제거와 걸레질, 온갖 물품들의 정리정돈, 냉장고 청소, 싱크대 청소, 화장실 청소, 다용도실 청소, 베란다 청소, 현관 청소 등이 몽땅 포함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로 알게 된 것은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과 생활이 유지되려면 요리, 설거지, 청소, 빨래로 퉁치는 항목 외에도 할 일이 두 배쯤은 더 있다는 것이다. 우편물 관리, 관리비나 공과금 등의 납부, 은행 대출 관리 등의 각종 금융과 보험 처리, 가계부와 통장 등 돈관리, 쇼핑 후 교환이나 환불, 주거용품이나 집 수리, 양가 어른의 경조사 일정 관리와 참여, 때에 맞춘 용돈이나 선물 준비, 전자기기와 전자제품 관리, 자동차 주유, 세차, 수리 등의 관리, 여행이나 나들이 계획과 준비, 짐싸고 짐푸는 작업 등 집안일의 종류는 전부 목록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러므로 남편들이 쉽게 전업주부인 여성들에게 '집에서 놀고 있다'거나 '(직장)일을 안 하니까' 나의 추가적인 요구나 요청을 쉽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집안일이 얼마나 많은지 잘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전업주부들은 집안일이 주로 내 일이라는 생각으로 역할을 다하는 경우가 많고 집안일을 프로의식을 가지고 관리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바쁜 사람들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집안일들은 정확한 출퇴근 시간 개념도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집안일을 전적으로 맡고 있는 전업주부라면 24시간 몸과 머리가 아주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 가족의 아침상과 저녁상 차리는 것만 고려해 보아도 집안일을 맡고 있는 구성원(주로 여성)의 근무 시간은 12시간을 훌쩍 넘는다.

특히 아이가 있다면 육아 자체가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야 하는 일이다. 이와 함께 육아로 인해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집안일의 양은 제곱배쯤 늘어난다. 기저귀 갈기, 수유나 분유 먹이기, 씻기기, 옷 갈아입히기, 재우기, 밥 먹이기, 놀아주기, 안고 업어주기, 재우기, 자다 깨면 달래기 등 수많은 할 일들이 있다. 이 부분은 각자의 경험과 상상에 맡기고 생략한다.


집안일과 육아, 그리고 육아로 인해 생겨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해 보고 분담하며 여러 시도를 해 본 결과 집안일과 육아 등의 일(편의상 '일'이라고 표현해 보겠다)의 분담을 둘러싸고 두 가지 성격의 일로 나누어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시점과 시간이 중요한 일이 있고 시점이나 시간에 관계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사 준비는 결정적으로 시점이 중요한 일이다. 해당 가족의 저녁 식사 시간이 7시냐, 8시냐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어찌 됐든 식사 준비는 그 시점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의 일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청소기를 돌린다거나 빨래를 돌리는 것은 대략 일주일 중 어느 요일에 해도 무방한 일에 속한다. 설거지? 설거지는 식사 직후 하면 가장 좋지만 미뤄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종류의 일에 속한다. 이런 일들은 오늘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아니고 일주일에 꼭 몇 회를 해야만 하는 종류의 일도 아니다.

수많은 부부들이 집안일을 나름대로 분담하고 있을 텐데 내가 나름 주변의 부부들을 관찰하고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체로 식사 준비에 대한 부분을 여성이 맡고 있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남편은 무얼 하냐 물으면 청소나 빨래를 맡고 있다 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여성이 맡고 있고 남편은 언제해도 몇 번 해도 상관 없는 일을 대체로 맡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것이 우연하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리 이런 부분까지 계산하고 분담을 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식을 했든 아니든 이런 식의 분담이 우리가 경험하는 가부장제와 가족제도 안에 전통으로 깊이깊이 아로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여자가 요리는 낫잖아.', '다른 건 다 할수 있어. 요리만 아니면.'이라는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들은 그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부부가 집안일과 육아를 분담할 때 나는 가장 먼저 시점과 시간을 지켜야 하는 일부터 나누어 분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들도 자기의 시간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감명깊게 읽은 《페어 플레이 프로젝트》(81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가사 노동 분담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남성은 자기 편한 시간에 할 수 있는 집안일을 하고,
여성은 미루거나 일정을 조정하기 힘든 일,
본질적으로 하고 안 하고의 선택권이 없는 일을 주로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략) 보통 남편들이 하겠다고 고르는 가장 흔한 집안일은
언제 할지 마음대로 정할 수 있거나 통째로 외부에 맡길 수 있는 일들이다."


그렇다! 바로 이거다!

우리 부부의 경우, 다행히(?) 나는 요리 경험이 제로에 가까웠고 잠깐 배워 볼까 싶었던 적도 있으나(나는 먹고사는 생존능력은 여자든 남자든 모두가 인간이라면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엄마가 적극적으로 말렸었다. "결혼하면 지겹게 해야 할 텐데 뭘 지금부터 배우냐." 우리 엄마 최고! 그래서인지 본능적으로 요리 잘 하고 좋아하던 남편에게 끌렸다. ㅎㅎㅎ 우리는 연애할 때 교환일기를 썼는데 혼자 살림을 꾸려본 남편은 종종 자신이 만든 깍두기나 멸치볶음에 대한 레시피와 맛에 대한 이야기를 쓰곤 했다. 이런 부분이 나의 호감도를 급상승시켰다. ㅎㅎ 대신 나는 설거지는 정말 자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시가에 첫 인사하러 가서 설거지는 내가 하겠다고 손 들었던 것이다. (그릇 깨고 오는 대참사를 저질렀지만...https://brunch.co.kr/@arachi15/4 )



우리 부부는 이제, 반드시 그 시간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중심에 두고 집안일과 육아를 분담하는 단계에 진입한 지 오래 되었다. 우리는 맞벌이 중인데 나는 9 to 6로 일하고 남편은 오후에 나가 대체로 밤늦게 들어온다. 아침 식사와 설거지, 아이 아침 등원, 등교를 챙기는 일은 남편이 전적으로 맡고 있다. 저녁 식사와 설거지, 아이 숙제나 준비물 등을 챙기는 일은 내가 맡고 있다. 먼저 시간대에 따라 집안일과 육아를 분담한 것이다. 처음에는 아침에는 직장에 출근하고 저녁에는 집으로 출근하는 일과가 참 힘들었는데 차차 적응이 되었다. 빨래는 오전에 남편이 돌려 널어 놓고 나간다. 청소기와 걸레질은 남편이 훨씬 자주 많이 하는데 점점 꾀가 나는지 용돈을 모아 걸레질까지 가능한 로봇청소기를 질렀다. 그리고는 로봇청소기에 이름까지 붙여 주고 애지중지한다. ㅎㅎ 나는 간단한 정리정돈 정도만 한다. 둘 다 하기 싫은 종류의 일들은 적절하게 나누어 하고 있다. 2개의 화장실은 하나씩 나누어 맡았으며 고양이들이 쓰는 화장실은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청소한다. 고양이 식사 제공은 10대인 아이가 맡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2년 여 간 아이 점심 식사까지 몽땅 남편이 맡게 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했다. 그도 이제 시간이 정해진 집안일이나 아이 돌봄을 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충분히 안다. 급히 장볼 것이 있으면 남편이 출근길에 사기도 하고 내가 퇴근길에 사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내가 조금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음을 그가 알아주고, 내가 너무 하기 싫어하는 음식쓰레기 버리기나 쓰레기봉투 처리 등은 대부분 남편이 하고 있다. 아이가 아픈 날 병원에 데려가는 일도 대부분 남편이 한다(내가 퇴근하면 병원문 닫았다). 우리는 오랜 시간을 거친 갈등과 조정, 다양한 분담 시도를 통해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사실 가사노동을 정확한 반반으로 측정하는 가능한 지 잘 모르겠다. 집안일과 육아를 눈에 보이게 해야 분담할 수 있다고 목청을 높혔지만(https://brunch.co.kr/@arachi15/11) 그렇게까지 측정되기가 쉽지 않은 일임을 안다. 지금은 냉장고에 각자가 집안일을 얼마나 하는지 써붙여 놓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나에게 물을지도 모른다. 집안일과 육아를 반반하는 게 그렇게 중요했냐고. 그렇다. 나에게는 중요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싶었다. 서로가 평등하고 합리적이라고 느끼는 수준에서 집안일과 육아를 분담하는 것이 해결책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나는 직장과 육아, 집안일을 나 혼자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슈퍼우먼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나와 아이의 일상과 생존이 걸린 절실한 문제였다. 머릿 속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고통이었기 때문에 중요했다.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데, 남들도 그렇게 산다는 이유로 참고 견디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자칭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결혼을 하면 어떻게 사는 것인지 세상에는 나의 모델이 없거나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한 번 살아보고 싶었다. 나에게는 그것도 중요했다. 그건 내 삶이니까. 나는 길에 나가 여성의 권익과 여남 평등을 외치며 싸우는 투사는 못 되었다. 비록 방구석에서지만 내 생활과 삶을 어제보다는 조금 더 평등한 하루로 만들어 보는 것은 한 번 해 볼 수 있는 실천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딸이 있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 낫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오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집안일 누가누가 많이 하나 배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