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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Mar 02. 2022

연상연하 커플, 시가와의 첫 대면

가면이 벗겨졌다 

결혼을 7월에 했다. 

5월에 시아버님 되실 분의 생신이 있다길래 그 시점에 우리는 부모님을 뵙기로 했다. 나는 아마도 바지 정장을 차려 입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기차를 타고 내려갔고 남자친구가 마중을 나왔으며 함께 부모님을 뵈러 방문하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처음 만난 사람과도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장착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날의 방문은 매우 긴장되었다. 그 이유는 내가 시댁에서 반길 만한 며느리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자보다 나이가 많았고 대학의 직속 선배였다. 아르바이트처럼 일은 하고 있었으나 번듯한 직장이라기엔 부족했다. 심지어 시민단체에서 상근자로 일하고 있었으며 단체 내에서의 지위도 남자보다 높았다. 정치하는 남자라면 흠이 될 일이 아니었지만 정치도 하지 않고 심지어 여자라면 명명백백한 흠이 될 사유도 한두가지 가지고 있었다. 시부모님께 결혼하기도 전에 이 모든 사실을 알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나의 순수한 남자 친구는 이 모든 사실을 부모에게 솔직하게 고백한 바. 이 사실을 알고 이루어진 방문이었기에 떨릴 수밖에 없었다.


대문 앞에서 우리는 그간 연습한 호칭을 되뇌었다.

"들어가면 누나라고 하면 안 돼." 

"알았어, 걱정 마, 아라씨." 

남자 친구는 몇 번을 더 연습했다. "아라씨, 아라씨, 아라씨!" 

남자 친구는 벨을 눌렀고 대문이 열렸으며 다들 문 앞에 나와 나를 맞아 주었다. 남자 친구가 말했다. 


"엄마, 누나랑 왔어요." 


그리고 1초 간의 정적.

 

인사를 드리고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고 무슨 얘길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때부터 나는 조카 덕을 크게 보았다. ㅎㅎㅎ 형 부부의 아들인 우리의 사랑스러운 조카는 당시 4살이었고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낯을 가리는 꼬맹이가 식사를 하려고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척 내 무릎에 와서 앉았던 것이다. 내 속마음은 '하늘이 돕는구나.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었다. (기독교인 아님 주의) 분위기는 절로 좋아졌고 나 또한 긴장감 속에서도 함께 웃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모든 것은 조카 덕분이었다. 


분위기 좋게 식사를 마치고 상을 치우는 타이밍. 

"제가 요리는 못 하지만 설거지는 잘해요!" 용감하게 설거지를 하겠노라 손을 번쩍 들었다. 식사 자리에 초대 받아 밥을 먹었으니 밥값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위도 처음으로 배우자될 사람 집에 가서 식사를 했다고 설거지를 자처하지는 않는다. 결국 나도 결혼 전부터 '며느라기'를 맞이했던 셈이라고 이제 와서 자평해 본다.

형님 옆에서 설거지를 거들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내 힘이 너무 셌던 것일까? 떨어뜨리지도 않았는데 유리컵을 세제 묻은 수세미로 문지르던 중 컵이 댕강 깨졌다. 윽. 이럴 수가. 손을 들고 설거지를 자청했는데 첫 날 시가 방문 자리에서 컵을 깨고 말았다. 괜찮다며 마무리는 혼자 하시겠다는 예비 형님의 말씀에 나는 설거지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약간 어색해하며 과일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이제 인사 자리를 마무리할 시점이었다. 먼 거리를 가야 하니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게 되었다. 화장실 문이 열려 있어서 열었을 뿐인데, 으악, 화장실에는 어머님이 계셨다. 나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으악, 어머님, 왜 문을 안 잠그셨어요?" 


이건 무슨 고장난 대사란 말인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기도 전에 나는 어머님 탓(?)을 하고 말았다. 황급히 죄송하다고 마무리를 했다. 어머님은 당황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무어라 잔소리를 하거나 조심성 없음을 탓하는 말씀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에게 당황했다. 


가면이 벗겨졌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내숭을 떨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미 숨기고 싶었던 모든 비밀은 남자 친구를 통해 부모님께 전해졌고, 부모님을 처음 대면한 날 설거지하다 컵을 깼으며 어머님 계신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 나는 그저 덜렁대고 설거지도 제대로 못 하며 성격도 만만치 않은 며느리로 출발해야 했다. 이게 득일지 실일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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