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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Jun 24. 2022

아이의 혼밥 능력 향상기

이제 10대 후반에 들어선 아이는 저녁에 엄마의 퇴근이 늦으면 혼자 밥을 차려 먹을 줄 안다. (물론 귀찮아서 대충 먹을 때도 많지만. ㅎㅎㅎ)


아이를 공동육아초등방과후에 보내고 좋았던 것 중 하나는 다양한 생활 능력을 키운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자기가 사용할 사물함을 만들고, 자기가 쓸 필통을 만들고, 자기가 안고 잘 인형을 만들고, 자기가 추울 때 목에 두를 목도리를 떴다. 그리고 고학년이 되었을 때는 합심해 장을 보고 요리를 해서 부모들에게 팔기도 했다. 돈까스도 팔고 주물럭도 팔고 카레도 팔고 다양한 일품 요리나 메인 요리를 판매했다. 부모들은 저녁 한 끼를 해결할 방금 만든 메인 반찬이 생겨 좋았고 아이들은 합심해 함께 만든 요리들을 팔면서 뿌듯하고 흐뭇했을 것이다.


나는 성인이 되었어도 자기 밥 한 끼 자기 손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어른(주로 남자 어른들이 많다)들을 보면서 정말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성인이면 독립적으로 자기의 일상 생활을 영위할 능력 정도는 갖추어야 하는데 자기가 먹을 요리 하나 못 만드는 어른이 무슨 어른인가 싶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어른이라 세상을 다 아는 양 말하는 게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런 어른이 나의 자유를 억압할 때는 대차게 반항했다. ㅎㅎ 또한 자립적인 생활 능력조차 가르치지 못하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 대해서도 문제 의식이 많았다.


내가 부모가 된다면 아이가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을 꼭 키워 주고 싶었고 그 중 꽤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던 것이 바로 식생활 능력이다. 식생활이야말로 생활 능력 중 꽃이 아닌가? 누구나 하루 세 번씩 밥을 먹으니까 말이다. 이미 초등학교 들어오면서 아이의 집안일 기회를 주고 그 때마다 레벨이 올라간 것을 칭찬해 주고 냉장고에 집안일한 횟수를 기록하게 해 용돈을 주기도 했다. (사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집안일은 다함께 하는 것이 당연한데 용돈을 주는 것이 마땅치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자발성 없이 억지로 시키는 것은 또 폭력이고 강요인 것 같아 적절히 타협했다.) 집안일 역량을 키울 때까지는 용돈을 줘서라도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저학년부터 빨래 널기, 빨래 개기를 함께 하자고 권했고 청소도 함께 하자고 권했고 의자 올려 놓고 설거지도 하게 했다. 4-5학년 무렵 잠자리를 독립하고는 자기 방 청소를 할 수 있는 무한의 권리를 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이 방 청소를 해 주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ㅎㅎ) 유아기에도 여느 집들처럼 주말에 간식을 만들 때마다 요리에 참여할 기회를 주었고 저학년 때에 이미 아이는 칼을 잡기 시작했다. 날이 무딘 칼을 먼저 주고 차츰차츰 배워 가서 4학년 즈음에는 과일도 깎을 줄 알았고 야채도 썰 줄 알았다. 아이가 본격적으로 10대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 초등학교 4학년 즈음부터는 혼자 라면, 계란, 빵 정도는 끓이거나 구울 줄 알게 되었다. 부쩍 어른들만 할 수 있는 행위들을 탐내고 엄마, 아빠를 부러워할 때마다 종종 이야기했다.


- 혼자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건 그만큼 더 자유롭다는 거지. 그리고 그만큼 어른이 되어간다는 거야. 조금 더 크면 하늘이도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혼자 혼자 밥을 차려 먹거나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하는 건 그런 단순한 기술과는 또 다른 영역인 '의지도' 있어야 하는 것이라 혼자 하게 하기 쉽지가 않았다. 나는 아이에게 이미 틈날 때마다 자기를 위해 밥상을 차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또 하루 세 끼 식사를 '대충 때우는' 것이 그 시간과 그 행위의 가치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임을 종종 얘기한 적이 있었다. 사실 이런 식생활 문화는 공동육아어린이집과 공동육아방과후에서 생활하면서 아이도 나도 새롭게 배운 것이기도 했다. 기회를 엿보던 중 갑작스러운 야근이 생겼고 아이에게 자기를 위해 멋진 밥상을 차려 사진을 엄마에게 보내라는 미션을 부여했다.


아이가 처음으로 자기만을 위해 차린 밥상


요리라곤 한 것이 없었다. 엄마가 만들어 놓았던 볶음밥에 냉장고에 있던 돈가스를 데우고 그 외에도 냉장고 반찬을 꺼낸 것 뿐이었다. 그래도 우리 부부는 아이의 사진을 받고 폭풍 칭찬을 해 주었다. 언제나 대단한 요리를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자신을 위해 밥상을 차리는 경험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집에 오니 아이는 맛있게 혼밥 후 상도 싹 치워 놓고는 소감을 말했다.


- 엄마, 내가 차린 밥도 맛있었어. ㅎㅎㅎ 근데 밥 차리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알겠어. 내가 쫌 귀차니스트잖아. (자기를 아는구나 ㅎㅎ)

- 그랬어? 10여 년을 매일 밥 차려 준 엄마 생각은 안 났고?

- 헐 그렇다고 할게. 녜녜. (영혼이 없군 ㅠ) 근데 엄마, 내가 생각해도 오늘 나 쫌 괜찮았어.


결국 아이는 자화자찬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대단한 일을 했다기보다는 귀찮음을 이기고 뭔가를 했다는 것, 자기 자신을 위해 굳이 밥상을 차려 보았고 그게 부정적인 느낌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게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 날을 시작으로 특히 지난 2년 간의 코로나를 거치며 아이가 집에 있는 시간이 부쩍 늘었고 이 때 아이의 요리 실력은 일취월장하기 시작했다.


미리 식사 준비해 놓고 나온 엄마의 요리를 먹지 않고 마늘을 썰고(세상에 마늘을 편으로 썰었다고?!!!) 소금을 뿌려 마늘새우버터구이를  먹었다고 사진을 보낸 날도 있었고 된장찌게 레시피를 묻길래 가르쳐 주었더니 혼자 블로그 레시피를 찾아 된장찌게를 끓여 먹고는 엄마, 아빠  보라고 상하지 않게 냉장고에  넣었다가 다음  아침에 본인이 끓인 된장찌게를 꺼내 주기도 했다.


- 엄마, 아빠! 내가 어제 된장찌게 끓여 놓은 거 아침으로 먹어. 맛있게 잘 됐어.

- 근데 엄마, 나 이거 만드는 데 두 시간 걸린 거 알아? ㅋㅋㅋㅋㅋ


자기도 그렇게 오래 걸린 게 웃긴 지 냉장고에서 된장찌게 냄비를 꺼내 주며 키득키득 웃는다. 처음 끓인 된장찌게, 야채마다 씻고 껍질 벗기고 썰어야 하니 처음 하자면 오래 걸렸을 것이다. 아이의 사소한 경험담과 아이의 작은 웃음이 좋았다. 엄마가 준비해 놓은 저녁을 차려 먹는 거에 그치지 않고 자기가 먹고 싶은 걸 자기가 해서 먹는 레벨이 되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이는 내 기대 이상이었다.  


이제 아이는 10대 후반에 접어들었고 아이가 저녁을 혼자 차려 먹게 되었을 때 나는 더이상 식사 준비를 미리 일부러 해 놓지는 않는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이나 재료들로 알아서 잘 차리거나 요리해 먹는다.


사실 나의 친정 엄마는 아이가 이미 10대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늦게 올 때마다 저녁을 혼자 차려 먹는다고 아이를 안쓰러워하실 때가 많다. 나는 이런 친정 엄마의 감정이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기를 바랐다. 아이가 자기를 스스로 가엾게 여기지 않기를 바랐다. 엄마께는 속으로 그런 생각 하시더라도 아이에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렸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를 둔 아이가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들이 스스로 즐겁게 만들어 나가고 가꾸어 나가는 즐겁고 능동적이며 자율적인 시간이기를 바라지, 왜 우리집에는 엄마, 아빠가 없나 혹은 왜 나는 맨일 혼자인가, 에 집중하며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데 시간을 보내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실 매일 집에 엄마가 있는 아이들 중 집이 답답하고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싶어하는 아이들도 많다. 사실 내가 그랬다. 그래서 집 밖에서 주로 놀았다. ㅎㅎㅎ

같은 조건이라도, 같은 경험이라도 아이들에 따라 다르게 다가갈 수 있는 건데, 기왕 혼자 있는 시간, 좀 즐거운 경험을 주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는 공동육아방과후에 다녔고 저녁 시간 퇴근이 늦으면 서로 이웃집에서 저녁을 먹고 놀며 엄마를 기다렸다. 다른 집 아이들도 우리집에서 종종 저녁을 먹었다. 서로 어려운 양육의 시간을 품앗이했으니까. 중학생부터는 아이가 이웃집에 가는 것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원했다. 사실 아이는 중학교 때에도 학원을 전혀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하교 이후 혼자 있는 시간이 꽤 길었을 거다.

아이는 혼자 피아노도 치고 기타도 치고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고양이랑 놀고 친구도 만나고... 여백의 시간 동안을 나름 잘 보낸 것 같다. 부모가 늦으면 혼자 요리를 해서 먹어도 즐거웠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내 양육의 목표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이를 잘 되게 하거나 성공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아이가 잘 독립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오은영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육아의 궁극적인 목적은 독립입니다.


아이가 19살까지는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지해 살아가다가 20살이 되면 갑자기 모든 것을 혼자 할 수 있게 될 리가 없다. 그러니 천천히 하나씩 자립적으로 해 나갈 수 있게 함께 준비해야 한다. 아이는 하나씩 자립해 나갈 준비를 하는 중이다. 나는 하나씩 아이가 혼자 하게 되는 걸 보면서 아이를 독립시킬 수 있는 마음을 준비 중이다. 아이가 점점 혼자 할 수 있는 게 많아지고 있다. 부쩍 어른스럽다고 느껴질 때도 많다. 이 관계의 변화를 나는 행복하게 즐길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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