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 찾기

by 아라

'중심 찾기'라는 활동이 있다.


진행자는 먼저 참여자들에게 활동의 공간(보통은 책상과 의자를 모두 치운 교실 같은 곳) 곳곳을 산책하듯 걸어다니면서 구석구석 충분히 살펴보도록 요청한다. 산책하는 듯 다닐 수 있도록 필요하면 배경 음악도 넣는다. 진행자 역시 참여자들과 같이 교실 공간 곳곳을 걸어 다닌다.


곧 진행자는 묻는다.


"이 활동의 이름은 '중심 찾기'입니다. 이 공간의 중심은 어디인가요?

이곳을 사각형 공간이라고 할 때 물리적인 중심인 한가운데, 여기가 중심일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여도 좋습니다. 어디라도 다 괜찮습니다.

각자 이 공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곳으로 가서 서 주시기 바랍니다."


참여자들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자신이 생각하는 '중심'으로 이동한다.

진행자는 각 참여자들이 서 있는 곳을 돌면서 인터뷰한다.


"먼저 가장 가까이 계신 분들을 만나겠습니다.

왜 '중심'이라고 했을 때 이 자리에 서 계신가요?"


"이 곳이 이 공간의 중심입니다. 여기는 한가운데입니다. 사각형의 무게 중심인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가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곳으로 그 곳을 중심이라고 생각한 이유를 묻는다.

"여기는 보시다시피 칠판과 교탁이 있던 자리입니다. 교실이라는 공간에서는 선생님이 서 계신 곳이고 모든 학생들이 여기를 바라보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기가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는 에어컨 앞입니다. 저는 더위를 많이 탑니다. 저에게는 에어컨 앞 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이기 때문에 여기가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워크숍 참여자일 때 나는 간식 테이블 앞에 서 있었고 역시나 진행자가 나에게 와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저는 여기 간식 테이블이 이 공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쉬는 시간이 되면 간식과 음료를 먹기 위해 모두 여기로 모입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워크숍의 첫 참여자였던 날, 사람들의 생각이 무척 다양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모든 '중심'에 서 있는 참여자들과의 인터뷰가 끝나고 진행자는 교실의 한가운데로 걸어가더니

갑자기 요구한다.


"저는 사각형의 무게 중심이라고 표현하신 답변이 가장 논리적이라고 생각해 마음에 들었습니다. 참여자들이 각자 생각하신 중심이 있겠지만 모두 이 곳, 제가 생각한 중심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뜨악' 했다.

'뭐라고? 기껏 각자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곳으로 가 서라고 하더니 자기 생각대로 모이라고?

오라고 하면 가야 하는 건가?'


생각을 하는 사이 이미 재빠르게 교실의 가운데로 가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뜨악' 하는 마음과 생각 때문에 밍기적거렸다. 마지못해 슬금슬금 이동하는 척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대충 멈추었다.


진행자는 다들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뜨악하기도 하면서 사람들이 모이자, 다시 말한다.

"참여하신 분들 각자가 생각하는 중심이 있으셨지요? 제가 지금 무리한 요구를 한 거 다들 아시지요? 이렇게 무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왜 다들 빠르게 제가 생각하는 중심으로 이동하셨을까요?"


여러 답변이 이어진다.

"진행자님께 무슨 뜻이 있겠지, 생각하고 이동했어요."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생각했지만 일단 이동했어요."

"저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모이라니까 그냥 모인 거예요."

"각자 중심을 찾으라 하더니 갑자기 여기가 중심이라고 선언하셔서 당황했어요."


'중심 찾기' 활동의 키워드는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이다.


우리는 세상이 갖고 있는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을 함께 찾아, 돌아가면서 칠판에 적어 나간다.


나이 많은 사람 - 나이 적은 사람

부자 - 가난한 자

어른 - 아이

남성 - 여성

선생님 - 학생

서울(수도권)- 지방(비수도권)

백인 - 유색인종

비장애인- 장애인

.

.

.


마지막으로 진행자는 '진행자'와 '참여자'라고 적는다.

진행자는 말한다. '진행자는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까의 그 장면, 진행자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모이라고 했더니 생각이 있었든 없었든 어쨌든 모여들었던 장면을 떠올린다.




정희진 선생님 책(주1)에서 만났던 한 가지 질문이 있었다.

"제주도에서 육지로 이동할 때 가장 불편한 지역은 어디일까요?"


정답은 '대전'이다. 육지에서는 교통의 요지이다. 지리상 한반도 남쪽의 중심부라 할 수 있고 기차, 차량 등으로 전국 어디로든 이동이 용이하다. 여러 기업이나 단체가 전국 모임을 종종 여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전에는 공항이 없다. 제주도에 가려면 항공편을 이용해야 하니 김포공항이나 청주공항을 이용해야 한다.


이 글을 읽기 전까지는 제주도로 오가기 가장 불편한 지역이 대전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대전에 살아보지 않았고 서울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늘 생각해 왔던 탓일 것이다. 나에게는 '서울 중심주의'가 있었던 것이다. '중심주의'라는 것이 이렇게나 무섭다. 늘 서울 중심으로 생각해 왔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본문이 시작하기도 전, 서문에 있던 질문이었는데 이 대목이 오랫 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은유 작가는 한 칼럼(주2)에서 청소년 대상 강의에서 자신의 편견이 깨진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청소년들 정말 대단하다'는 발언을 했는데 한 청소년이 말했단다.

"만약에 작가님께 누가 '여자가 이런 글도 쓰고 대단하다'는 말을 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이것은 '나이 중심주의'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어린 사람에게 주로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른은 성숙, 아이는 미성숙이라는 잣대가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의 칼럼 제목은 '이분법의 유혹'이었다.


이렇게

중심주의는 이분법(bifurcation)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주3)

모든 중심주의는 열린 사유를 가로막는, 우리의 뇌수에 박힌 압정이다. (주3)


'중심찾기'를 하면서 그 날 우리는 '중심과 주변'이라는 하나의 이분법을 깨는 것을 몸으로 연습하였다.

그럼에도 오랫 동안 갇혀 있던 이분법의 세계가 한 번에 깨지지는 않았고 매일 매일 노력해야 하며 여전히 나는 갈 길이 멀다. 그래도 매일 매일 연습하려고 한다.


내가 하려는 하나의 연습은 변방과 경계에 서는 연습이다.

다행히 지금의 일터는 사회에서, 교육 환경에서 변방의 일이다. 이 일터에서 나는 오랫 동안 변방의 일을 맡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복받은 일일지를 시시때때로 느낀다.


신영복 선생님(주4)은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변방이 원동력과 잠재력있는 곳이라 하였다. 새로운 역사는 변방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또 변방은 단순히 공간적 개념이 아니며 '변방성', '변방 의식'이라고 하였다. 현재 중심에 있다 해도 변방 의식을 내면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갇혀 있는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영토을 찾아나서기 위해 '자신을 변방에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늘 마이너리티, 소수자의 입장에 서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 자체가 변방에 서 있으니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주5)을 읽다가 놀라운 그림을 하나 발견했다. 변방이 중심보다 시야가 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을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쳤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이렇게 넓게 볼 수 있구나. 많이 생각하고 많이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중심에 대한 모든 컴플렉스가 날아가 버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하고 있는 두 번째 연습은 '중심을 해체하여 큰 하나가 되어가는 것을 상상하는 연습'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를 여성 중심의 사회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남자든 여자든 상관이 없어지는 것을 상상한다.

유색인종이 백인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종이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자가 자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가르치며 모두가 함께 배우는 것이다.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중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있어도 누릴 수 있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


중심주의에 대한 가장 철저한 비판은 중심주의의 단념에 있다. 60년대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흑인이 백인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하는 대신 “백인과 흑인이 형제가 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간디는 신사의 나라 영국의 야만적인 지배에 맞서 싸우면서 인도인의 영혼이 영국인의 그것보다 더 위대하다는 주장을 하는 대신 “인도인이 영국인과 같은 권리를 누리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인도인의 위대함을 드러냈다. 그는 “인드라, 미트라, 바르나, 간디아루트만 등 수많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절대자의) 실제는 하나이다”라고 노래한 의 전통을 이어받아, “세계에는 오로지 하나의 종교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다양한 많은 가지를 지닌 튼튼한 나무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사상, 자신의 종교, 자신의 전통만이 중심임을 포기함으로써 인류는 모두 함께 중심에 설 수 있다. (주6)




이 날의 배움은 오래도록 머릿 속에 남아 있다.

오늘도 여전히 그것을 꺼내 보며 나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서 무엇을 보는가.'



주1>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주2>

주3>

주4> 신영복, 《변방을 찾아서》

주5>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주6> 이성수, “중심을 넘는 ‘지움’의 논리”, 〈한겨레21〉

표지 이미지> 2019. 4. 직접 찍었음.




글에 들러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새로운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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