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싸매고 고민했다
아이는 매일 오전이면 가까운 산으로 들로, 놀이터로 공원으로 나들이를 다니는 공동육아어린이집에 다녔다. 다행히(?) 공주옷(?) 취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치마를 입겠다고 했다. 특히 더운 여름일수록 그랬을 거다. 여름에는 나도 그랬다. 한 번 치마를 입기 시작하면 바지 입기 힘들다. 바지가 더 덥고 치마가 훨씬 시원하기 때문이다.
어린이집 다니던 시절, 하원하기 위해 아이를 데리러 가면 한겨울을 제외하면, 대부분 모래놀이터에서 모래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니 당연히 모래 바닥에 털썩 '쩍벌 자세'로 앉아 작은 삽이나 소꿉놀이 도구로 모래를 파고 담고 모양을 찍기도 하고 다른 그릇에 옮기기도 하며, 바쁘게 신나게 놀고 있었다.
어느 날, 하원을 위해 터전(공동육아어린이집은 단순히 '기관'의 의미를 넘어서 아이들의 생활과 삶을 위한 공간의 의미를 담아 어린이집을 '터전'이라고 부른다)에 도착하니, 치마를 입고 아이가 모래에 철퍼덕 앉아 있는데 속옷이 보였다.
- 엇? 팬티 안으로 모래가 들어갈 수도 있겠는데?
나는 적절한 사이즈의 속바지를 구매해 치마를 입고 어린이집에 가거나 외출 시 아이에게 입히기 시작했다.
한편 엄마인 나는 치마를 입을 때 속바지를 꼭 챙겨 입는 편이다. 속바지를 입는 이유는 아주 명확하다. 혹시나 카메라에 찍히는 등의 불법 촬영이나 성추행 등의 성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세상 남자들에 대한 믿음이 아주 적은 편이다. 왜 그리 부정적이냐는 류의 질문을 하는 분은 안 계시기를 바란다. 여성학과에서 공부하며 논문을 쓰려고 두 세대에 걸친 여성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새삼 놀랐다. 2-30대와 5-60대 여성들이 겪은 대표적인 공통 경험은 성추행 경험이었다! 누가 태워준 차 안에서 당했다, 대중교통에서 당했다, 길거리에서 당했다 등등, 장소는 제각각 다양했다. 다양한 시공간에서 성추행이 행해지고 있었다. 엄마인 여성과 딸인 여성의 예외 없이 공통된 경험이 성추행이라니 참 나. 기가 막혔다. 나 역시 대중교통에서 그리고 길거리에서 성추행 당한 경험이 있고 대체로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분이 너무 나쁘거나 무서운 경험(위험할 뻔한 경험도 한 번 있다)이었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이 부정적이라서, 여성들이 부정적인 성향이 있어서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남자들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그러던 어느 주말, 아이와 함께 외출 준비를 하는데 아이가 덥다고 속바지를 입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입기 싫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아이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입히는 유형의 엄마는 아니어서 그러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뭔가 속바지를 입지 않고 외출하는 상황이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내 마음의 소리를 만났다.
- 그래, 얼마나 덥겠어. 더워 죽겠는데 왜 여자들이 참고 속바지를 입어야 하는 거야? 그놈의 불법 촬영 때문에... 그놈의 성추행범들 때문에...
그러고 보니 나도 사실 더운데 참고 속바지를 입는 거였다. 세상의 남자들이 여성들에게 너무 자주 성추행을 비롯한 성범죄를 저지르는 현실에 새삼 빡쳤다. 저지르는 자들이 나쁜 놈들인데 내가 혹은 내 아이가 조심해야 하는 이 상황에 화가 났다. 그리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우리가 너무 쉽게 딸들에게 몸 단속을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영유아기 때부터 '치마 입으면 속옷 보이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쩍벌남'이 많은데 비해 '쩍벌녀'가 많지 않은 이유는 어릴 때부터 여자는 다리를 모으고 앉으라는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유튜브에 <여자라서, 듣고 싶지 않은 말 55가지>라는 영상이 있다. 아주 어린 여자 아이가 나와서 말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위의 언급들이 다 있었다.
- 여자답게 행동해야지. 얌전하고 조신하게.
- 무슨 여자애가 남자애처럼 다리를 쫙 벌리고 앉니?
점점 여성들의 나이가 올라가고 여성들은 말한다.
- 위험한데 일찍 일찍 좀 다녀.
- 여자가 담배를 펴?
(출처: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4RRC82kENr0)
조디 포스터가 주연한 '피고인'이라는 영화가 있다. 작은 술집에서 한 여성(사라)이 집단 성폭행 당한 사건을 다루는 법정 드라마다. 처음에 이 사건은 사라가 사건 당시 음주 상태에서 마리화나를 불법 소지했다는 것을 이유로 단순 폭행 사건으로 처리된다. 분노한 사라가 변호사인 캐서린의 도움을 받아 '피고인'을 법정에 세우게 되는 스토리인데,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 중 하나는 "피해자가 성폭행 사건의 원인 제공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라는 부유한 여성도 아니고 번듯한 집안의 여성도 아니고 고학력의 엘리트 여성도 아니다. 그녀는 술집 웨이트리스로 일한다. 그녀는 심지어 마약을 한다. 사건 당일에도 불법 마약을 소지했다. 게다가 짧은 치마를 입고 남자 앞에서 춤을 췄다는 점이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동한다. 그럼에도 결론은, 여성이 어떤 배경을 가졌다 해도, '행실'이 어떻든 간에, 여성이 성폭행 사건의 원인 제공자는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지갑을 잘 간수하지 못해 눈에 뜨이는 곳에 두었다고 해서 지갑을 도둑 맞은 사람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 명명백백 지갑을 훔쳐 간 사람의 잘못이고 절도죄가 성립된다. 이럴 때 지갑을 왜 눈에 잘 뜨이는 곳에 두었냐고 법정에서 질문받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었다고 해서 성폭행 당한 사람에게 어떤 책임이나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 성폭행을 저지른 사람의 잘못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유죄를 알리는 배심원들의 결정과 함께 자막이 오른다. "6분마다 1건의 성폭행이 일어나고 4건의 성폭행마다 1건은 한번 범행을 저지른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딸아이에게 속바지를 입힐 것인가. 나는 본인의 선택에 맡기기로 했다. 본인이 불편하면 안 입는 거다.
여성으로 살면서 앞으로 딸아이도 나처럼 성추행을 당할 수 있다. 어쩌면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수도 있다. 가능하면 그 어떤 일도 겪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기에 여성으로 살면서 처할 수도 있는 여러 어려움과 불편함들을 딸에게 숨기지 않을 것이며 이야기하고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딸의 몸을 단속하는 말은 가능하면 하지 않기로 했다. 딸아이에게 속바지를 입힐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어느 덧 중학생이 되어 우리 집에서 친구와 파자마파티를 한 다음 날, 친구가 집에 가 잔소리를 들은 이야기를 전하며 딸아이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 엄마! OO이 엄마가 다음에는 가지 말라고 그러셨대. 여자는 집에서 자야 된다고! 이게 말이 돼? 민폐니까 가지 마라, 걱정되니까 가지 마라도 아니고, '여자라서!' 엄마는 나한테 이런 말 안 하는데!
나, '여자라서'라는 말은 쓰지 않는 엄마다. 잘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