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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Jul 06. 2022

아이 없이 여행을 떠났다

엄마들의 '해방일지'

회사 일정으로 지방 출장 가는 날. 문득 아이 없이 떠났던 여행의 기억이 떠오른다.

때는 아이 9살 무렵. 세 명의 아이 엄마들이 아이들과 아빠들을 남겨 두고 해외 여행을 떠났다. 세 명의 엄마는 초등 공동육아를 함께 하는 '공동육아 동지'들. 함께 공동육아를 할 뿐 아니라 저녁 시간에 퇴근이 늦으면 서로의 아이를 돌봐 주기도 하고 종종 아이들 저녁도 함께 먹이고 서너 가족 함께 캠핑도 함께 다니는 사이였다. 아침엔 직장으로 저녁엔 집으로 출근하는 고충을 잘 이해하는 사이였고 아이들 고민이 있어도 함께 나누는 사이였다.


우리의 여행지는 싱가폴. 당시 싱가폴에는 동생이 거주 중이었는데 일이 있어 몇 주 정도 집을 비울 것이라 했다. 무료 숙소 제공이 가능하니 혹시 쓸 일 있으면 쓰라는데 '때는 이때다' 싶었다. 어느 날 저녁, 함께 아이들도 엄마들도 어울려 밤마실 중 “같이 싱가폴 여행 갈래요?” 했더니 다들 너무 좋다길래 그길로 날짜를 맞추고 항공권을 끊었다. 절대 취소하지 않겠어! 나는 그 전해에도 싱가폴 동생 집에 아이와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어 가이드는 내가 맡기로 했다. 모두에게 가고 싶은 곳을 한 곳씩 정하게 해 모두의 의견을 받았고 우리는 바닷가도 가고 크랩도 먹으러 가고 놀이동산도 가고 여러 곳을 신나게 다녔다.


그 중 셋이 딱 꽂혀 ‘꼭 가자!’고 한 코스가 있었으니 밤 9시에 여자들끼리 오면 무료 맥주 쿠폰을 준다는 한 호텔의 이벤트였다. 밤 9시에! 우리끼리(= 아이도 없이! 남편도 없이!) 술을 마실 수 있다니!!! (사실 지금 생각하니 그 호텔이 우리 같은 아줌마의 방문을 고려해 잡은 이벤트는 아니었겠다 ㅎㅎㅎ)


우리는 오후 일정을 위해 외출했다가 시간 맞춰 집으로 돌아왔다. 왜냐면 호텔 드레스코드에 맞게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낮까지 불편한 복장으로 다닐 수 없으니 갈아 입어야지. 굳이 집에 돌아와 일찌감치 김치찌게 끓여 저녁을 든든히 먹었다. 그리고 꽃단장(?)을 시작했다. 우리가 공유한 준비물에 ‘원피스’가 있었다. 오직 호텔 밤나들이를 위해서 준비한 드레스코드. 옷 갈아 입으며 대화가 끊이질 않았고 서로 예쁘다 칭찬하기 바빴다. 이렇게 꾸며본 게 얼마만이야! 원피스 입으니 너무 예쁜데? 여태까지 본 중에 젤 예뻐! 우리도 오늘은 이런 옷 입을 수 있다고! 마주 앉아 곱게(?) 화장도 했다. 우리도 우리가 어색한 가운데 계속 웃음이 터졌다. 서로 화장도 도와 주고 옷 매무새도 봐 주고… 그렇다. 우리는 완전 들떠 있었다. 아이를 낳고 육아를 시작한 뒤 그렇게 꾸미고 다른 가족들 신경쓰지 않고 나의 재미를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은 전생의 기억 같은 거였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순간, 가족 안에서의 역할을 벗어 버린 그 순간의 그 설렘과 들뜸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걸어가지 않을 거야! 호사를 부릴 거야! 우린 당당하게 택시도 탔다. 호텔은 왜 이렇게 큰 거야? 어디로 올라가야 하는지도 몰라 호텔 안에서 길을 잃으며 물어물어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 엘리베이터에 사람도 많구나. 아 진한 향수 냄새. 평소엔 알러지 유발 냄새인데 오늘만큼은 나도 향수 좀 뿌릴 걸. 그렇게 도착한 호텔 꼭대기 맥주펍. 테라스로 나가 야경을 보며 스탠딩 테이블에서 맥주잔을 ‘챙’ 부딪히고 첫 모금을 마시면서 눈이 마주친 순간, 웃음이 터졌다. "엄마들의 자유를 위하여!" 맥주가 뭐라고, 호텔이 뭐라고. 호텔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 자체도 즐거웠겠지만 돌이켜 보면 그건 ‘해방감’이었다. 그 해방감의 이유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말고 나로 오롯이 존재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맥주를 즐겨야 나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 감정은 매일매일 순간순간 매여 있던 역할에서 벗어난 해방감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언제나 아이의 욕구에 먼저 응답하느라 내 욕구는 뒷전이었는데 그런 생각 않고 그저 내 욕구에 충실해도 되는 시간이 주는 해방감이었다. 엄마의 역할로서만 내가 존재하는 것 같았는데 그 역할을 잠시나마 벗어던진 해방감이었다. 엄마가 아니었던 시절의 생활과 삶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엄마로서의 삶이 익숙한데 잠깐이나마 그 짐을 벗어버린 순간의 해방감이었다. 말 그대로 우리는 찐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그 여행에서 바닷가도 다녀 오고 놀이 공원도 다녀 오고 여기저기 많이 다녔지만 다녀와서도 내내 우리가 가장 좋았다고 꼽은 순간은 바로 그 날 그 시간이었다.



사실 첫 해방감의 기억은 아이가 공동육아어린이집에 간 지 3년차, 아이 6살 즈음이었다. 6월 즈음 터전살이(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함께 1박 2일을 보내는 것. 여름 단체 여행을 준비하고 미리 경험해 보는 시간이다)를 하던 날이었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집을 비우는 날이라 나처럼 들떠 ‘오늘은 실컷 먹고 마시리라’ 결심한 이들이 많았다. 우리는 집에는 가지도 않고 밖에서 모여 우아한 식당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우아하지는 않게(?) 술을 (퍼)마셨다. 늦게까지 놀다가 자정도 넘은 시간에 귀가하다 보니 늦잠은 당연지사. 다음 날 10시까지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했는데 나는 전화를 받고서야 잠에서 깼다.

“아라치, 얼른 일어나. 지금 아라치가 안 와서 못 가고 있어요. 어여 하늘이 데리러 터전으로 와요!” 

으아악! 신나게 놀다가 아이 데리러 갈 시간도 놓치고 자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아이 데리러 온 다른 아마(엄마아빠를 이르는 말)들은 우리 아이만 남게 될까 봐 마지막 아마인 나를 기다려 주고 있었던 거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고도 부끄러운 이불킥의 기억이지만 밤마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본인이 원하는 시간에 퇴근하는 것도 부러운 날들이었다. 퇴근시간 ‘땡’ 하면 유리구두도 못 챙겨 신은 신데렐라처럼 아이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주5일을 뛰어가야 하는 신세가 참 버거웠다. 나는 퇴근할 때마다 남아 있는 동료들에게 "신데렐라는 이만 퇴근합니다." 인사하고 나왔었다. 아이 아빠의 퇴근 시간은 10시. 나도 마음껏 야근하고 싶었다. 나도 퇴근하고 가끔은 친구도 만나고 싶었다. 결혼 전에 맺었던 내 인간 관계의 대부분은 이때 다 끊겼다. 이제 같은 어린이집 엄마들이 친구가 되었다. 온라인에서 만난 함께 아이 키우며 울고 웃은 엄마들이 새 친구가 되었다. 나를 둘러싼 인간 관계가 완전히 변화되었다. 결혼 전 아무리 친했어도 거의 만날 수가 없었다. 낮엔 직장에 있어야 하고 저녁엔 아이를 돌봐야 하니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이제 아이 엄마들 뿐이었다. 


기혼 여성의 삶에서 엄마 역할, 아내 역할, 며느리 역할, 딸 역할들을 뻬면 무엇이 남을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직장에서 아무리 가치 있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한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엄마, 아내, 며느리, 딸의 역할을 떠나지 못한다. 일을 하다가도 어린이집에서 아이 아프다고 전화라도 오면 사정사정하고 집으로 뛰어가는 건 99프로 엄마들일 거다. 학교에서 아이가 다쳤다고 연락 오면 학교로 뛰어가는 것도 99프로 엄마일 거다. 이렇게까지 크고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어도 매일 땡 퇴근하면 아이들 저녁 먹이러 집으로 뛰어 가는 사람도 90프로는 여성들일 거다. 나무꾼에게, 선녀가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 날개옷을 주지 말라고 했다지. 아이 셋을 낳고 기르는 시간은 나를 잊어 버리고 엄마, 아내로만 살아가게 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저 하늘에서의 우아한 삶은 기억 저편으로 보내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이게 바로 가부장제의 숨은 목적일지도 모른다.



집에 오니 아빠들은 아이들을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아빠들끼리 모여 아이들을 몰고(?) 놀이동산에도 다녀왔다고 한다. 그렇다. 아빠들은 엄마가 없는 시간이어야 가아끔, 1년에 두어 번 주양육자 역할을 한다. 아빠들이 나도 할 만큼 한다고 힘들다고 하면 안 된다. 주5일 신데렐라, 안 해 본 사람은 모른다.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의 대부분 아빠들은 부수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제나 아이는 더 익숙한 엄마를 찾기 마련이다.

아빠들도 가끔이라도 엄마 없이 아이와 오롯이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래야 전적으로 아이가 의지하는 것이 기쁨도 주지만 부담도 준다는 걸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될 거다. 맨날 집에서 ‘애랑 놀면서’ 뭐가 힘드냐는 소리를 더 이상 안 하게 될 거다.

공동육아어린이집에서 1년에 한두 번 아이와 아빠를 두고 ‘엄마 모꼬지’를 가는데 바람직한 문화다. 아빠들이 1박 2일 간은 오롯이 ‘주양육자’를 경험하는 순간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5살이 될 때까지 아이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 없는 아빠들도 있었는데 이보다 귀한 선물이 어디 있을까.


우리도 사실 맥주 한 캔 사 먹을 돈이 없는 상태는 아니어서 무료맥주가 우리를 잡아끈 건 아니었다. 항상 다음 날에도 학교에 가는 아이를 씻게 하고 잠자리에 들게 하는 그 쳇바퀴 도는 일과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실컷 해방감을 맛 본 후 각자의 집으로 돌아왔고 일상으로 엄마로 돌아왔다.


나는 사실 아이가 엄마 보고 싶어 울까 봐 집에 초콜렛 선물을 남겨 두고 왔었다. 그리고 아이 것 사는 김에 아이의 아빠 것도 사서 두고 왔었다.


- 하늘아, 냉장고에 하늘이 꺼 한 통, 아빠 꺼 한 통,

초콜렛 넣어 뒀어. 엄마가 너무 보고 싶으면 엄마 생각하면서 하나씩 꺼내 먹어.


귀국 후 아이가 하는 말.


- 엄마, 아빠는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나 봐. 그 다음날 초콜렛을 다 먹었어.


- (꼭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냥 초콜렛이 너무 먹고 싶었겠지.)


굳이 말은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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