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 다시 만나지게 된다고 해도 여전히 짧은 시선만으로 넘겨버릴지 모른다. 속으로만 , 혼자서, 생각을 곱씹으며 '아, 당신이구나' 할지도 모르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먼저 다가가 '안녕' 가벼운 인사를 건네는 일 말이다. 그는 그런 사소한 배려를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배려가 없지 않으나 '사소한' 배려를 행하는걸 몹시 부대껴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걸 두고 '넌 왜 그래? 왜 그걸 못해서 사람을 늘 의기소침하게 만들어?' 타박할 수는 없었다. 딱따구리처럼 야무지게 쏘아대던 말들은 거의 대부분 공기 중에 증발되어 사라지는 수증기 같았다. 서로의 감정선이 정확히 일치하는지 자신이 없었고 모든 사람이 나와 반갑게 인사를 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그럴 수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오래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 좋자고 상대에게 감정을 강요하는 건 폭력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앞에서 말했듯 나는 다만 사소한 배려를 바랐던 거지만 그건 그냥 내 생각일 뿐이고.
사소한 배려라 칭하는 아무것도 아닌 듯 가벼운 인사를 먼저 했던 건 걷잡을 수 없던 그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나의 인사를 예상보다 너무 반갑게 받았던 거다. 다행이라 함은 걷잡을 수없던 마음이 조금은 안정세로 들어서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고 불행이라 함은 이 마음이 더 걷잡을 수 없게 되면 내 일상은 어떻게 되는 거지 라는 불안에 기인한 것이었다.
특별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목소리가 성우처럼 돋보였던 것도 아니고. 성격이 살가워서 다정다감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그때, 그 시절에 꼭 그였어야만 했다. 그와 함께 마신 따뜻한 커피 한잔이 유치하게 기억될 때도 있지만 커피마니아인 나는 그깟 커피 한잔이라는 말로 치부할 수는 없는 거였다.
그와 나는 늘 뭉근한 시선을 주고는 받았지만 시선 사이엔 늘 얄팍한 살얼음이 깔려있었다. 누구든 한 발짝만 움직이면 바스러져 빠지고 말, 뻔히 보이는 결말이 놓여 있었다. 담담한 시선으로 따뜻한 꽃밭을 거니는 것보다 뭉근하고 친절한 눈빛으로 이루지 못할 사랑을 하는 것을 택한 건, 나 역시 그와의 결말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현실이 된 사랑보다 추억 안에서만 발현되는 그와의 사랑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현명하게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사소한 배려를 나누고 난 후부터 내가 듣던 모든 노래 속 리듬 안엔 그가 나타나 음표 위를 뛰어다녔다. 그렇다고 뭐, 슬프지는 않았다. 나도 알고 그도 알지만 표현하지 않고 묻힐 수밖에 없었던 고차원적인 감정이 어른스러워 보였을 뿐.
진정 슬플 땐, 이제 두 번 다시 그 사소한 배려를 베풀 수 없겠구나 라는 자각이 온 머릿속에 각인되고 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