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8일의 기록
대화라는 것에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냥 누군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고. 평소 말수가 그리 많지 않은 나는(물론 내가 관심을 깊이 두고 있거나 궁금한 게 많아지거나 할 때 제외) 화자보다는 청자인 경우가 많고 화자가 됐을 때도 딱 내가 정해뒀던 범위 안에서 얘기하고 그 외의 얘기들을 문답을 통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말 계속 얘기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저렇게 계속 얘기할 수 있나 신기하기도 하고 그 텐션에 따라가지 못해 기가 빨리기도 한다.
어쨌든 며칠 많은 사람과의 직/간접 대화(대면/비대면)를 통해 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고 있는데(덴마크 와서는 평소 사람과의 교류가 이번보다 적은 편, 혼자 사유하기 딱 좋다) '대화'의 기본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다.
'대화'란 '문답을 일컫는 말, 서로 마주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의사소통 방식'으로 의사소통 그 자체와는 조금 다르다. '의사소통'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뜻이 통하는 것'으로 대화라는 방식을 통해 서로의 생각 교환이 이루어지는 행위를 뜻한다.
정말 잘 통하는 사람과는 무슨 얘길 해도 척하면 척하고 서로가 의도하는 바가 이해되지만 또 어떨 땐 서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때가 바로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때다.
그렇다면 이 대화라는 게 문화적으로는 어떻게 다를까?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불편하지만, 서로 다름을 알고 있기에 굳이 나누자면, 동양은, 대표적으로 한국이나 일본 등의, 공동체 성향이 강해서 고맥락대화 high-context communication을 주로 하고 서양은, 대표적으로 미국이나 독일 등,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나라들은 저맥락대화 low-context communication을 사용한다. 쉽게 말해서, 고맥락 대화는 돌려 말하는 것이고 저맥락대화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한국은 눈치(눈치라고 하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너무 권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눈치보다는 센스라고 표현할 때가 많지만)가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국가인 것이 이런 대화 방식을 사용해서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공동체가 개인보다 더 중요한 사회이니 말의 맥락을, 즉 글의 행간을 파악하는 능력, 얼마나 파악하느냐가 얼마나 효율적이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이냐는 것에 영향을 준다는 말이다. 반대로 공동체보다는 개인이 우선되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의견을 표현하고 그 때문에 대화에 숨은 뜻을 내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덴마크에 와서 첫 수업에 들어갔을 때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말 잘하는 애들이 너무 많아서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좀 시간이 지나 보니 정말 제대로 된 지식을 이해하는 친구들이 있는 반면, 별 중요치 않은 얘기를 하는 친구들도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좀 더 지나니 중요하고 중요치 않고는 중요한 게 아니더라는 결론. 서로 잘 모르는 것에 대해 문답의 과정을 통해 개인이 공부하고 있는 이론이나 지식에 대해 정리하고 공고히 해나가더란 것. 물론 이건 한국인인 내가 느낀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또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엔 천편일률적인, 주입식으로 정답만 강요하는 한국의 교육 방식에 대한 대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 정답을 강요하지 않고(답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나누면서 각자의 답을 내리고(내리지 않아도 상관없음) 서로가 합의(동의든 반대든)될만한 게 어떤 것인지 생각을 나누는 과정(그 행위 자체를 중요시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
너무 길어지니 일단은 여기까지만 정리를 해놓는 것으로.
이게 또 동양/서양 문화로 나눌 수도 있고 세대 간 대화 방식의 차이로도 설명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좋고 나쁘다가 아니라 다르니까 서로 인지를 하고 접근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