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칠월의 앤 Aug 18. 2024

뇌과학에 대한 단편적 생각

'운명의 과학'을 읽고 난 후  

한 사람의 인생에는 흔히 말하는 '변곡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변곡점이 없는 완만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믿는 사람들 역시 누구든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순간이나 사람 그리고 경험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으로 단순한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함이며, 그 점은 모두 다 다른 형태로 저마다의 시기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인생의 피크(peak)가 각자 다르기에, 각자 만족하는 수준과 삶의 기대치가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이 값으로 인생을 논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진영의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익숙해진 요즘, 이것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러하다. 나라의 경제 수준과 관계없이 어느 사회든 기득권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흔히 말하는 '선진국'의 기준은 북미와 서유럽의 기준에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기에, 그들의 정해놓은 수치적인 경제사회선진국의 기로에 선 국가들일 수록 진영의 논리가 오히려 견고하다. 다 그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선진화된 사회일수록 모두들 기존의 삶의 방식을 지키고자 하는 보수진영과 그것에 도전하는 노동의 세력으로 나뉜다. 흔히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권 등 멋져 보이는 이러한 가치들이 선진화된 사회에서 구현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란 '착각'을 하지만, 모든 사회에서는 불합리함과 부조리가 존재하며,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그런 나라는 세상에 없다. 다시 말해 '차별'은 인종, 종교, 성별에 관계없이 어느 사회든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조금 더 복잡한 이념의 차이와 역사관이 섞여 있기 때문에, 보수와 노동의 진영으로 구분하긴 어렵지만, 큰 틀에서 보면 '너'와 '나'라는 진영 구분선을 반듯이 긋고 흑백논리로 세상으로 정의하는 것이 심적으로 편한 국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긋기, 내편, 네 편, 적, 아군 이런 극단적인 단어들이 난무하고 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낭만을 논하는 것은 사치이다. 그리고 돈과 관련성이 적은 것들을 생각하는 행위는 도태된 사람들의 쓸데없는 놀이가 되어버렸고, 네 편이 든 내편이든 누구나 뛰어든 '나라 걱정'은 물론 '나 안위에 대한 걱정' 그 이외의 걱정은 모두 시시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완전히 엉켜버린 실타래를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풀어내는 것은 엄두조차 나지 않지만, 내 생각엔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근원, 쉽게 말해 '왜' 이러는지 근본적인 눈에 보이는 어떤 객관적인 사실에 의해 정의 내리려는 시도에 대한 호응이 같다. 그래서 뇌과학이나 인지 심리학과 같이 '직관적인(intuitive)' 학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 더 나아가 지지가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어떤 진영 논리보다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뇌과학이나 인지심리학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다. 인체의 신비를 방불케 하는 생체용어가 나오면 갑자기 호기심의 스위치가 자동 소등되는 경험도 했지만, 거의 장장 2개월에 걸쳐 운명의 과학(The Science of Fate, 저자: Hannah Critchlow)을 읽었다. 이 책은 체질적으로 비만인 사람, 다양한 중독에 걸리기 쉬운 유전인자 등은 물론, 심리적으로 우울감이 심한 사람들 역시 근본적으로는 유전인자에 기인하지만, 환경, 의지 및 노력에 의해 어느 정도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면서 결국엔 이타주의적 삶을 지향하자는 희망찬 메시지로 5가지 '팁'을 제시하며, 책을 마무리 짓는다. 이 책 말무리에 저자는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사회적 낙담이 허무주의나 비관주의로 비화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면서 '책'을 쓴 사람의 어떤 책임감하에 희망의 메시지로 긴 글을 마무리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저자의 일부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삶을 살아가는데 내가 바꾸려고 해도 바꾸지 못하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고, 심지어 바꾸고 싶지 않은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회든 권력을 움켜쥔 사람들이 정한 룰이든 토론을 통해 정한 룰이든 이 모든 것들은 모두 '주류'들이 만든 기준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학벌사회, 족벌사회가 형성되는 것이고, 이 사회에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 없이 자유롭게 자신감 넘치는 나의 논리와 주장을 펼쳐도 당당한 사회가 세상 어디에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운명의 과학 저자 역시 캠브리지대를 다닌 재원이고, 분명 그녀의 학벌이 이 책을 쓸 때 그리고 출판사에서 책을 팔기 위해 많이 활용했을 거라 믿는다. 이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인정받는 단체'에 들어가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다. 이 것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주류화가 다양성을 인정하기보다 기득권으로 변형될 때, 다양성은 실현되어야 할 선의 가치로 수용되기보다 도태된 사람들의 핑곗거리로 전락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 굴레 속에서 나는 누구이며 이곳은 어디인가. 이러한 질문은 상당히 진부하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일종의 절대적인 물음이다. 사는 것이 귀찮다고 느껴질 때 일 수록 억지로라도 삶을 놓지않기 위해 소리 없는 외침, 그리고 적응해야 할 습관으로 삼아야 할 삶의 양식처럼 기꺼이 물을 마시고 숨을 쉬듯 이 물음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자살이나 삶의 포기와 같은 비관적인 분위기가 유행처럼 퍼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희망을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행복의 정의 역시 모두들 다르다. 나의 행복은 하하 호호 웃음으로 가득 차있지 않다. 행복의 정의는 자의식(autotellic personality)이 투철한 것이라고 책에서 읽었는데, 나의 자의식은 뭔가 어둡고 인생의 아픈 곳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를 들추어내며 이 것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고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과 토론을 할 때 실현된다. 나 같은 미물이 삶의 거대한 담론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 모든 문제들을 마치 카펫 밑에 덮어버린다면, 그 먼지와 더러운 찌꺼기들은 결국 카펫을 상하게 만들 것이다.


내 인생의 변곡점이라, 이 점은 없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인지하지 못한 채 이미 그 점을 찍고 반환점을 돌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질적인 것이나 어떤 경험이 더 이상 나를 자극하지 않고, 내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반대의 논리를 받아들여 새로운 결론을 도출해 나가자는 어떤 삶의 태도만 망가트리지 말자고 매일같이 다짐한다. 그래야만 편협한 사고 속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세상을 흑백논리로 보지 않을 테니 말이다. 뇌과학에서 말하는 시냅스가 최대한 많이 적극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도록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자고, 이 것은 내가 거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니, 그렇게 해주자고 다짐한다.


  

작가의 이전글 위선, 가난한 상상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