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칠월의 앤 Aug 13. 2024

위선, 가난한 상상력

결국은 모두 나의 선택

나의 사무실 창문에는 나체의 레이디 고디바, 로베르트 드와노의 사진, 타카오카 도라에몽 박물관 포스터가 나란히 붙어있다. 이 부조화스러운 3가지 이미지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모습을 이 공간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어떻게든 채우려고 여기저기 붙여두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을 볼 때마다 위로가 되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나의 마음을 동(動)하게 하지 않는다. 마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삐뚤어진 모자로 치부하며 그림에 재능이 없다고 해맑게 자랑하는 아이를 함부로 판단하고 나무라는 가난한 상상력의 어른처럼 말이다.


그 어떤 것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는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는 겁이 많아서 눈을 감고 뜨는 것은 기계적인 반복에 불과할뿐이다. 육체가 이렇게 버거울 줄이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또 시작이네.'란 푸념과 함께 사회와의 계약을 파기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서고, 회사에 온다. 하지만, 이 공간에 들어온 순간부터 새장에 갇혀있다는 생각과 함께 종이더미에 스스로를 파묻고 '뭐라도 해야 한다'는 자의적 압박감에 갇힌 채 장장 8시간을 가까스로 버틴다.  


그야말로 버티는 것이다. 버티지 않고서야 이 무료함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이 2평 남짓의 공간을 채운 그 많은 명언들과 그림, 좋아하는 캐릭터의 사진도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되어버렸다. 하루아침에 이 것들이 모조리 사라진다 하더라도 놀랍거나 슬프지 않을 것 같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기쁨과 슬픔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건가? 이런 생각과 함께 그 어떤 것도 '아무것도 아닌 거'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사는 것 자체가 굉장히 귀찮은 일, '부담'이 되어버렸다.


몇 개월간 자율성이란 명분하에 철저히 분리되고 방치되어서 그런지 나 스스로를 유기하기 시작했다. 심리상태는 상당히 빈곤하지만 자존감만큼은 타협할 수 없어서 나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사무실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하루에 몇 번이나 '한계'에 다다랐다고 그렇게 되뇌며, 탈출할 방법만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이 탈출이라는 것이 이제는 물리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그마저도 내 마음대로 안된다며 낙담하고 앞길이 캄캄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란 생각이 내 머릿속에 언제 걷힐지 알 수 없는 먹구름처럼 시커멓다. 단 한 번도 나 스스로 하고 싶은 일과 좋아하는 것을 고민해 본 적이 없는데, 지금 그런 고민에 늪에 빠져 심리적 고문을 감내하고 있다. 그러다가 무엇이라도 새로운 것을 찾으면, 흥미를 갖지만, 이내 흉내에 불과한 흥미라는 것을 깨달으니 모든 것이 금방 시시해진다. 마치 오랜만에 바둑을 두려고 큰 마음을 먹고 장롱 속을 죄다 뒤져서 바둑판과 바둑알을 찾았건만, 먼지를 털어낸 바둑판의 선들은 모두 빛이 바래 사라졌고, 검은 바둑알이 흰 바둑알보다 눈에 띄게 많은 돌 바구니를 마주한 느낌이랄까. 그리고 나랑 바둑을 두겠다는 사람도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일상의 낭만. 이 역시 사치였을까. 낭만은커녕 단단하게 지켜온 일상의 리듬도 완전히 깨졌다. 이유는 정확히 짚을 수는 없지만, 완전한 사기저하와 기만에 대한 소리 없는 저항과 농성을 이어갈 뿐이다. 조직에서 오랫동안 방치된 인간이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다. 그래서 이렇게 불만으로 가득 찬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차라리 '글을 쓰자.'라고 생각했지만,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시상도 글감도 영감도 아무것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마음속 독(甕)에 영구적 손상이 나아서 이제는 완전히 깨부수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추억이란 명분으로 이 항아리를 버릴 수 없다면 그것은 기억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꼴이나 마찬가지일뿐이다. 이 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안락함에 젖어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지해야 하나. 계급사회의 한계인가. 아니면, 철저한 자아실현에서 당연한 고통의 단계를 겪고 있는 것인가. 어떠한 기준에서 지금의 상황을 바라보면 계급사회에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한 자가 어쩌다가 그들의 들러리 역할을 하고 있어서, 현타가 와버린 것일 수도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기준, 이를테면 학력도 아닌 '학벌'로 사람을 구분 짓고, 시험에 통과여부에 따라 급을 나누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이곳에서 나는 그 어떤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유유히 흘러가는 시냇가 속에 단단히 박힌 바윗돌과 같은 존재란 생각이 든다. 바윗돌과 같은 존재. 흘러가는 시냇물에 계속 씻겨 더 이상 반들반들해진 표면이 아닌 마모되고 있는 존재. 그런 존재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하루하루 이 새장 같은 회사에 나오는 게 그렇게 가기 싫었던 학교에 나오는 것만 같다.


훌쩍 떠나고 싶지만, 돌보아야 할 가족이 있고, 이 가족은 나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직장을 내키는 대로 그만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용기도 나지 않는다. 내가 정말 혐오하는 것은 이 직장과 내 신세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은데도 정작 무엇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귀찮고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리고 괜찮은 급여를 받고 있어서 그만두지 못하는 이 말도 안 되는 타협이다. 이 것이야 말로 내가 가장 증오하는 속물스러움이자 위선이 아닌가.


지금의 상황이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몰두하는 어떤 것을 찾아 나서지 말고 자연스럽게 때를 기다리자. 그렇게 다짐하며 책상에 앉아있지만, 이만큼의 글을 쓰는 것도 이제는 힘들다.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고 느껴본 것도 최근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을 귀찮게 여기는 상상력이 가난한 어른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개탄함에 스스로 분노한다. 이 모든 결정을 한 것은 결국 '나'이지 않느냐며, 그렇게 상황과 남을 탓하지 않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할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무랄 것 없는 날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