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C가 왜곡한 노동자의 숭고한 인권
잠시 외출했다가 들어오는 길에 파리바게트에 들러 아침에 먹을 식빵을 샀다. 평소 꼭 찾던 슈크림빵도 집어들었고 베이글도 하나 추가했다. 매장은 휑했다. 낮 시간이라지만 도심에 위치한 프랜차이즈 빵집에 손님이 나 혼자인 건 조금 생경한 광경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와 건너편에 있는 뚜레쥬르 매장을 살폈다. 안으로 손님이 몇몇 보였다. 시선을 돌려 손에 들린 빵 봉투를 바라봤다. 이토록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최근 SPC의 제과 공장에서 청년 노동자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건 과정이야 수많은 뉴스에서 다뤘으니 굳이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사건을 대하는 기업의 태도에 대해서는 써볼 만할 것 같다. 그들은 희생자의 장례식에 자사 빵을 다량 보내 보는 이를 경악케 했다. 임원들은 빈소에 찾아가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했다. 사건 발생 후 6일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공식 석상에서 기업 차원의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것은 희생자와 유족들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왜 대국민 사과였을까. 대국민 사과도 필요했을 테지만 순서가 아주 틀려버렸음을 그들은 몰랐을까. 그저 지점 매출과 주가가 폭락하는 것만을 걱정해 급급하게, 경황이나 진심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이 허공에 올리는 사과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을까.
그들은 청년이 사고로 숨진 현장에 흰 천막을 치고 작업을 계속 진행시켰다. 그다음 날에도 직원들을 출근시켰다. 같은 시각 사고 현장에 있던 직원들도 포함이었다. 일말의 배려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해당 공장의 직원들을 타지 공장으로 파견 보내기도 했다. 교육이 명목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그곳에서 근무를 했다. 동료의 죽음이라는 충격 속에서 노동자에게 쉼이란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사고가 발생한 공장은 불과 5개월 전에 안전인증심사를 받고 이와 같은 사고를 막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권고를 받은 바 있다. 지난 2년여간 스무 명이 넘는 노동자가 끼임사고 등의 안전사고를 당한 탓이다. 이러한 상황 중에 계열사 공장에서 또 다시 노동자의 신체가 상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더 이상 변론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노동자의 근무 안전 보장을 위한 권고 사항을 무시한 것부터, 안전을 위한 근무 수칙을 지키지 않은 것, 사고 이후 보인 비인간적인 기업의 태도까지 모든 것을 봤을 때 이것은 과연 사고가 맞는지 의구심이 피어오른다. 무관심과 침묵, 피로 물든 탐욕이 낳은 인재가 아닌지.
꽤 많은 지인이 SNS를 통해 해당 기업 계열사 제품을 불매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중에는 평소 그 제품들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었고, 계열사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이들도 있었다. 불매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았다. 잘못된 기업 경영으로 애꿎은 점주들에게 불똥이 튀는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으니까. 그들을 생각하자니 불매라는 행위는 조금 잔혹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잘못은 기업이 했는데, 해당 계열의 지점을 운영한다는 이유만으로 피해를 봐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상당히 불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은 백 마리의 양 중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그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나서지 않겠냐고 질문한다. 단순히 보면 한 마리를 찾다가 아흔아홉 마리를 잃을 수도 있고, 잃은 숫자가 한 마리에 불과하니 그저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이유는 잃어버린 양이 '한 마리'이기 때문이다. 한 마리 정도는 괜찮지, 한 마리 때문에 나머지를 돌보지 않을 수는 없지와 같은 태도는 남은 아흔아홉 마리를 갉아먹을 뿐이다. 남은 양 중에서 또 한 마리가 없어진다면 그때도 방임할 것인가. 거기서 다시 또 한 마리를 잃는다면. 그다음엔 두 마리, 세 마리가 사라진다면. 한 마리에 대한 무관심은 백 마리 전체에 대한 무관심과 동일하다.
한 마리를 지키는 것이 백 마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오늘은 타인이지만 내일은 내가 될 수도 있다. 오늘은 전혀 관계 없는 사람이지만 내일은 소중한 가족이나 친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럴 때도 우리는 무관심으로 일관할 수 있을까. 개인이라는 가치가 커지고 느슨한 연대, 적당한 무관심이 미덕인 것처럼 둔갑한 세대지만, 그럼에도 우린 한 사회를 이루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 문제에 우리가(그리고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이며,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것이 우리가 노동자와 노동환경에 대해 관심 갖지 않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기업과 다른 점이고, 그들은 결국 이토록 많은 것을 잃고 있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합리에 대응해 외치는 소리가 있고, 불매라는 행위(또는 어떤 형태로든 나타나는 사회적 행위)로 여론이 형성되고,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점주까지도 소비자와 같은 목소리를 내게 된다면(벌써 계열사 중 한 곳의 점주들은 국민의 분노에 공감하며 본사에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열에 하나, 둘 정도는 변할 것이다. 물론 당장은 티도 안 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역사 속에서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변해 왔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대부분의 것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확실하게 불매 전선에 뛰어들기까지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해당 계열사 제품을 구매하기 전에 한 번 이상은 생각해 볼 것이다. 그들의 만행과 무고하게 희생된 아직 피지 못한 젊음을. 지금도 여전히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여러 안전 사항을 뒤로 한 채 삶을 이어가기 위해 분투하는 고귀한 노동자들에 대해. 염치 없지만, 이 생각 한 번이 더 나은 세상에 작게나마 보탬이 되길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