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6월 5일 커피를 안 마셨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더라?
이상한 날이었다. 혼돈 속 질서라고, 계획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이 30년간 살아온 파워 P지만, 그 안에도 나 나름의 루틴과 규칙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침범 당하거나 깨져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일말의 J적 성향이 작은 폭발을 일으킨다. 맞다. 짜증이 난다. 암튼 이런 건 중요하지 않지만, 그 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커피를 끊었었다. 생활 패턴을 내 뜻대로 가져갈 수 없음이었다. 카페인은 각성과 불온전한 휴식을 동반했다. 커피에 의존한 깨어 있음은 몽롱하기도 무기력하기도 했다. 수면의 질은 떨어지고 자야 할 때와 그러지 말아야 할 때를 분간하지 못했다. 이러한 경험을 한 뒤 이를 생활 패턴의 붕괴라고 명명하고는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얼그레이나 다즐링이나 쟈스민 같은 것, 스스로가 조금 건강해 보이기도 하고, 남달라 보이기도 했다. 누구나 마시는 아아 대신 선택한 무슨 무슨 티는 나는 일반적인 사람과 다르다고 보여주고 싶은 알량한 오만이었다.
그런 커피를 다시 마시게 되는 순간이 왔다. 대학원. 이 곳은 신학대학원으로, 일반적인 대학원과 그 결이 조금은 다른데, 그래서인지 큰 긴장감 없이 왔다가 된통 혼나고 있다. 지금까지는 밤샘 공부를 하는 데, 또는 밤샘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건강한 식사(?)와 정신력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내가 발들인 곳은 이러나 저러나 대학원, 순수 정신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차는 이미 잊혀진 지 오래요, 커피는 곁에 잠시라도 없으면 불안해지는 심신 안정제가 되어 버렸으니, 애석한 인생이다.
처음 커피를 다시 마시기 시작할 때 나름 규칙을 정했다. 오전에만 마신다. 카페인은 체내에 열두 시간 즈음 머문다고 하니까, 수면의 질 보장을 위해서는 그리 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계산 아닌 계산을 했더랬다. 다만 그것이 깨지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오전은 무슨 저녁에도, 심야에도 졸리다 싶으면 마시고, 땡긴다 싶으면 마시고 있으니, 카페인 중독자가 따로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커피를 안 마신 날이 있었다(이제 본론이다. 그리고 이렇게 서론을 주절주절 길게 쓴 경우, 본론은 짧고 내용도 없다). 시험을 한 주 앞두고 주중을 맞던 월요일, 긴장이 풀린 건지 그간 갈아 쓰던 체력을 어떻게든 보충하고자 본능이 나를 짓누른 건지 그날은 저녁 6시까지 잠에 취해 있었다. 아무 소리 듣지 못하고 그저 고요히 잠들었다. 일어났을 땐 정신이 맑고 개운했다. 아, 잊고 있었던 맨정신이란 이런 거구나! 새삼 (얼마 남지 않았지만) 하루가 산뜻하고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창문을 열고 깊이 심호흡을 해 보며, 도심의 탁한 공기를 맑은 정신으로 마시는 게 건강한가, 카페인에 함몰되어 몽롱한 정신으로 산 속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게 건강한가 생각해 본다. 그 무엇도 유익하진 않을 것 같다. 이다지도 가여운 존재다, 대학원생이란.
생각이 이즈음 미치자,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급격히 밀려온다. 맞다. 지금은 시험기간이다.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공복으로 뭐라도 해보겠노라 이리저리 정리를 하고는 결국 유튜브 숏츠에 들어간다. 결연한 의지의 귀결이 겨우 그쪽이라니, 한심하기도 하다.
그런 날이다. 커피를 마시지 않아 생생하지만, 그 말똥말똥한 정신을 온전한 곳에 쓰지 못하는 날. 정신은 분명하고 결연했으나 손끝은 도무지 흐물거려 결국은 키보드 타이핑이나 펜을 휘갈겨 쓰는 것이 아닌 유튜브 숏츠나 넘기는 것이다. 참, 미스터 션샤인 숏츠가 참 재밌더라.
암튼, 그런 날이다. 그냥 – 갖은 스트레스에 두서없이 키보드를 두드린다. 내용도 없고 감동도 없지만, 재미는 있었으면 좋겠다. 재미있었나? 그렇지 못했다면, 당신과 나 사이에 남은 것은 유감일 뿐이다. 애석하고 가여운 인생이다. 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