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고 장엄한 환희
붙잡은 시간 속에서 찾은 인생의 진의
그래서 이 사람은 이 글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내내 묻는다. 가장 사랑하던 형의 생명이 점차 희미해져 가던 것을 온몸으로 감각한 그는 ‘다른 직업을 알아보라’고 하는 미술관 경비원이 되었고, 자신이 이루고 붙잡았던 모든 것은 허공에 그대로 흩날렸다.
흘러가다 보니 도착한 곳, 또는 거쳐가는 곳인 어느 미술관 경비원 자리로 그는 구태여 발을 옮긴다.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그곳은 오로지 먼저 시대를 지나간 자들의 예술, 그뿐이다. 소위 ‘거장’이라 불리던 많은 이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의 어떤 것들은 선명하게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브리링의 발걸음이 닿은 메트로폴리탄은 그 본산이다.
많은 관람객을 향한 “예술에서 배우려고 하기보다는 예술을 배우려 한다”는 안타까운 한숨은 그가 메트로폴리탄에 온 진의로부터 나온 것일 테다. 역사는 지나간 시간이고, 죽은 자들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중 남겨진 여러 가치 있는 것들은 오늘 산 자들에게 다가와 삶의 방향을 짚는다. 그것이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브리링은 삶과 죽음은 대척점에 있지 않고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메트로폴리탄이 그의 안식처가 되고 피난처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인류의 죽은 듯했던 과거가 살아 움직이는 순간을 체험하고, 그것들을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 있다는 환희와 안도가 아니었을까.
형은 그에게 예술이었을 것이다. 지나갔지만,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형상, 전하고 싶은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인생은 어딘가에 고독히 앉아 철학적 사변을 하는 것이 아닌, 지나가고 다가오는 모든 것 속에서 어지럽게 떠다니고 또 남는 것이기에. 때문에 이 책은 지극한 일상, 오늘도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인생 가운데 놓인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깊은 애도이자, 넘치는 환희다. 먼저 간 형을 기억하는 그만의 방식이며, 가장 넉넉하면서도 인생을 첨예하게 통찰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기쁜 선언이다.
덧없어 보이는 길이겠지만, 그럼에도 때때로 장엄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순간에 평안한 호흡을 하고 싶다.
“광대함 속에서 길을 잃어”도 매일 “조용한 아침”은 찾아오고, 오감이 살아나는 그때 “침묵과 정적 속에서 범상치 않은 것 혹은 예상치 못했던 것을 경험하는 행운을 누리는” 인생이 되길, “바보 같으면서”도 “용감한 생각”으로 누군가를, 또 무언가를 이해하는 삶이 되길 진심 어린 마음으로 기도한다.